즐겨찾기에 추가
글자작게 글자크게
[세상의 창] 중국인의 식문화_정승열 법무사(대전)
  • 트위터로 기사전송
  •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 구글+로 기사전송
  • C로그로 기사전송
  • 이선용 기자 | 2022.04.04 09:08 입력

정승열.jpg


※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서 살육전을 벌였다. 식인 풍습은 아직도 일부 원시인 사회에서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최근세까지 수천 년 동안 인육을 식용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쟁과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을 때 시체를 뜯어먹고, 어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자식이 부모를 죽인 원수를 죽인 뒤 간을 꺼내먹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중국 식재료는 날아다니는 것 중 비행기, 물속에 사는 것은 잠수함만 빼고 모든 것을 요리할 수 있다고 할 정도인데, 전해오는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하(夏) 왕조 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에 최초로 식인 기록된 것은 은(殷)의 주왕(紂王)으로서 달기와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고사를 만든 주왕은 삼공 중 한 사람인 구후(九侯)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강제로 첩을 삼았다. 이에 분노한 구후가 악공과 함께 주왕을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자, 주왕은 구후를 해(醢)로 만들고, 악공은 포(脯)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또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로 만들어 먹었다. 해는 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이고, 포는 인육을 찢어서 말린 것, 자는 불고기로 요리한 것 등 다양한 요리법이 발달했다. 주왕은 황비호(黃飛虎)의 여동생을 첩(黃貴妃)으로 삼더니, 황비호의 아내 가씨(賈氏)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자 가씨가 적성루(摘星樓)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에 황귀비가 주왕을 비난하니, 주왕은 황귀비를 적성루 아래로 던져 죽이고, 가씨를 해로 만들어서 황비호에게 먹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치욕을 겪은 황비호는 훗날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죽였다.

 

그러나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周)나라 때는 ‘식인의 형(刑)’이 정식 율령이 되었고, 이후 크고 작은 전쟁에서 패한 포로들은 승자들의 "고기 요리"가 되었다. 상황에 따라서 병사 이외에 백성들까지 하루에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정쟁에서 희생당한 관료들도 승자의 먹이가 됐다. 이런 식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평화시대에도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 대도시에는 식인 요리가 널리 퍼졌으며,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공자도 사람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중국의 고전인 예기(禮記),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논어 등에 공자는 ‘해(醢)’를 무척 즐겨하여 이것이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의 수제자 자로(子路)가 위나라 재상으로 있다가 살해된 후 그 시체를 해로 만들어 보내자, 충격을 받고 그 이후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해(醢)를 인육이 아니라 젓갈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또, 사기열전에는 한고조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 회남왕 팽월(彭越)을 역모죄로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제후와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유비도 인육으로 만든 "포"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 있다. 또, 우리가 흔히 먹는 만두(饅頭)의 유래도 송의 사물기원(事物紀元)에 있다. 즉,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났는데, 사람들이 남만의 풍습에 따라 사람의 머리 아흔아홉 개를 물의 신에게 제사 지내야 한다고 하자, 제갈량이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의 음식을 빚어 제사를 지내니 풍랑이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음식을 속일 만(瞞), 머리 두(頭)를 썼으나, 이후 음이 같은 ‘만(饅)’을 빌려서 ‘만두(饅頭)’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만두를 명절 음식으로 하고, 떡국에 넣기도 하고 만둣국만을 끓여 먹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또, 수양제는 자신을 거역하는 신하를 삶아 죽인 뒤, 그 국물을 문무백관에게 나눠주어 마시게 했는데, 이런 식인 풍습은 당 시대에 보편적인 식문화가 되어서 미식가들은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하여 즐겨 먹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여서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로 불렸으며, 인육이 많이 유통되어서 개고기의 1/5 정도의 밖에 안 될 정도였다. 당 말 황소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구당서 황소 열전에는 황소 군대가 동군을 300일간 포위할 때 허(許), 여(汝) 등 부근 10여 주(州)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뼈째 맷돌에 갈아 병사들의 식용으로 공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용마채(舂磨寨)라고 하는 커다란 절구 같은 인육 믹서기를 수백 개 싣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인육을 가공하는 작업장을 설치하여 포로는 물론 백성을 대규모로 징발하여 군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 말,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치고 송이 들어서자 한때 인육 판매를 금지했지만, 이미 보편화된 식문화를 바꾸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가 법이 폐기되었다. 인육을 먹는 습관은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져 전국에는 인육을 사고파는 시장이 많았는데,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대표적인 상설 인육 시장이었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되었고, 여자의 경우 외모가 괜찮으면 기방으로 팔려 가고 얼굴도 변변치 못하고 일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었다. 또, 중죄수를 처형하여 인육으로 팔기도 했는데, 인육 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원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 송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인육을 요리하는 방법도 상세히 소개되고 있는데, 철경록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가 나온다. 철경록에서는 인육의 가격은 여자, 남자, 늙은이 순서였는데, 늙은이의 고기는 탄력성이 없고 질겨서 국거리용으로밖에 쓰지 못해서 값이 싸고, 어린 아기는 부드러워서 여러 요리에 쓸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비싸고 했다.

 

원나라 때 연경에 왔던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복주(福州)에서 목격한 식인 풍습을 ‘…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횡사한 사람의 고기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도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의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다음에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을 죽이고 그 피와 고기를 먹는다...’고 했다.

 

명 시대에도 개봉(開封).중경(重慶) 등지에 대규모 인육 시장이 있었으며, 사천(四川)에는 남자 인육이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죄인을 처형하는 사형장에서 민중들은 사형수의 고기를 먹기도 했다. 명의 원숭환(袁崇煥) 장군이 청의 계략으로 역적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을 때, 군중이 몰려와서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원숭환의 부하들은 뼈만 수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말레이시아에서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팔기도 했다. 청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던 증국번(曾國藩)은 그의 일기에서 1860년 장쑤성에서 인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 난으로 인플레가 되어 130전까지 폭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중국의 민낯인데, 이처럼 인육은 중국의 식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다른 고기보다 저렴한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지금은 인육 습관이 완전히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 이선용 gosiweek@gmail.com ]
이선용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gosiweek@gmail.com
     
ⓒ 공무원수험신문 · 고시위크.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주)피앤피커뮤니케이션즈 / 사업자등록번호 : 119-86-69743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10626(공무원수험신문), 서울, 다10660(고시위크) / 발행인 및 편집인 : 마성배
서울특별시 금천구 서부샛길 606 대성디폴리스지식산업센터 210-1호 / Tel. 02-882-5966 / Fax. 02-882-5968
전자우편 : gosiweek@gmail.com / gosiweek@hanmail.net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용
Copyright © GOSIWEEK (공무원수험신문, 고시위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