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질주하고 싶은 자동차 공학자의 길 찾기
문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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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아이들이 저를 아우토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거기까지가 그 자식들 한계에요. 아마추어란 이야기죠. 아우토반은 독일어로 고속도로 전체를 말하는 것이에요. 아우토반 중에서 제한속도가 무제한인 자동차 전용도로는 ‘크라프트파르슈트라세’라고 해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저의 별명은 ‘크라프트파르슈트라세’라고 불러야 맞죠. 선생님도 잘 아시고 저를 부를 때는 정확한 제 별명으로 불러주세요.”
“아. 예. 예. 선생님이 별명 한 번 불렀다가 원근이에게 톡톡히 가르침을 받는구나. 덕분에 선생님도 하나 알았다. 그런데 왜 왔니?”
“저는 이다음에 카레이서가 되는 게 꿈이에요.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고, 그 누구보다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람보다는 속도와 경쟁하고 싶다는 말이죠. 또 그렇게 빨리 달리는 차를 만들고도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래서 자동차 공학과로 진학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찾아보니까 생각보다 몇 군데 학교밖에 없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쭤보러 왔어요.”
“그렇구나. 요즘 자동차 공학과를 모빌리티 학과로 이름을 바꾼 대학들이 많아졌어. 모빌리티 학과도 함께 검색하면 도움이 될 거야.”
자동차 공학과 관련한 학과가 있는 대학을 원근이와 함께 검색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인쇄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원근이와 같은 반 친구들이 상담실로 들어왔다. 친구들은 원근이를 보면서 반가움을 표시했지만 원근이는 잔뜩 긴장된 상태로 친구들을 외면하면서 자료를 급히 챙겨 들고는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상담실을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적의 진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미사일 같았다. 남아 있던 친구들이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한 질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원근이는, 진로 수업 시간에 자신은 일단 군대에 가서 무엇이 되었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을 운전하는 것이 일차 목표라고 했다. 가능하다면 북극에 가서 쇄빙선도 운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전쟁터에서나 얼음 바다에서나 방해되는 것은 다 물리쳐 나가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선 전투력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해서 팬티도 군용 팬티만 입고 다닌다고 하였다. 만화 그리기가 취미인 원근이가 그린 만화에도 폭력적인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원근이는 그런 아이였다.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강점도 있었지만, 정서적으로 함께 고민해 봐야 할 부분도 많은 친구.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유원근. 언제나 화가 난 표정은, 어쩌면 세상이 원근이를 대하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세상이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면서 공격하는 것이 무서워 원근이는 진지를 구축하고 자신의 영역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잔뜩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원근이의 공격적인 모습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수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의 강점은 그대로 간직한 채 약점을 승화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쉬워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원근이가 말했다. 얼굴로 ‘봉사활동, 이런 거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주 쉬운 방법이 있지. 다리 건강한 우리 크·라·프·트·파·르·슈·트·라·세라면 아주 손쉽게 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있지!”
더듬더듬 자신의 별명을 불러주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원근이가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 봉사활동을 하려면 연습이 필요한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봉사활동이 어떤 것이에요?”
“연습 과정을 다 통과하면 알려주고 싶은데, 괜찮겠니?”
“정말 쉬운 거죠?”
그날부터 3일간 우리는 함께 점심시간마다 10분씩 교정을 거닐었다. 주로 나무들이 많고 학생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을 걸었다. 첫날은 그냥 조용히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둘째 날은 내가 앞서 걷고 원근이는 뒤에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종류별로 10개 쓰기’를 과제로 냈다. 눈을 감은 채로 가끔 멈추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다. 원근이는 진지하게 소리에 집중하였다. 가끔 숨이 가쁜지 크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바람 소리, 자기의 발소리, 학교 담 너머 차들의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 선생님 숨소리,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 윙윙대는 벌레 소리, 점심시간을 마치는 예령 벨소리.’ 원근이는 고1 남학생답지 않게 섬세하게 여러 소리를 듣고, 그것을 글로 잘 표현하였다. 어쩌면 예민하게 주변 상황에 반응하는 성향이 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셋째 날은 그 소리가 원근이에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자신의 말로 중얼거리면서 걸어보라고 하였다. 원근이가 앞서서 걷고, 나는 조금 뒤에 떨어져 걸었다. 원근이는 과제를 해결하려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10분을 보냈다. 다른 대상의 소리를 듣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 소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근이가 외부와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제 이 아이에게 세상에는 편안하게 소통할 수도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봉사활동을 소개해 줘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정도면 연습은 충분히 잘했다. 이번 봉사활동이 봉사 시간도 채우고 원근이의 강점은 더 강하게 만들고 약점은 보완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제 강점과 약점이 뭔데요?”
“네 강점은 우선 말을 잘한다는 것이지. 물론 글도 잘 쓰고. 그리고 선생님이 함께 걸으면서 알게 된 또 다른 강점은 다른 사물의 소리를 잘 듣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야. 아주 뛰어난 강점이지. 그런데 그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네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그 강점은 때론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소리는 잘 들리지만 어떤 소리인지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그게 심해져서 아예 그 의미를 파악하지 않아버리는…. 그래서 세 번째 과제를 수행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그래도 세 번째 과제를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면 또 강점인 것도 같고 …. 선생님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 하하.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주말에 시간 괜찮니? 선생님이랑 같이 생활이 어려운 할머니께 도시락을 배달해 드리는 봉사활동을 해보자. 혹시 주말이 어려우면 시간은 같이 조절해 보자. 봉사활동 하면서 선생님이 이야기한 강점과 약점에 대해 생각해 주면 참 고맙겠다. 하기 싫으면 그냥 봉사활동 해도 되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마라.”
나는 원근이와 함께 산동네에 사시는 할머니께 주말마다 도시락을 건네드리는 봉사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3주만 할 계획이었으나 원근이가 더 하고 싶다고 하여 3주 후부터는 원근이 혼자 계속 도시락을 배달했다. 원근이가 도시락을 건네드리는 할머니는 말수가 적으시고 자상하신 분이셨다. 원근이가 어떤 말을 해도 늘 웃으면서 들어주시고 덕담 위주로 대답을 해주시는 분이셨다. 덕분에 원근이는 할머니 앞에서는 수다쟁이가 되어 많은 말을 편안하게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속이 안 좋으셔서 된장국에 조금 밥을 말아드셨다고 했다. 또 상 위에서 밥을 안 드시고 바닥에서 드셨다고 했다. 아들에게 잘못한 죄인이어서 그러신다고 했다. 그래도 아들이 잘 성장해서 미국에서 세탁소를 크게 하고 있다고 자랑도 하셨다고 했다. 원근이는 그렇게 잘 사는 아들이 있는데 할머니는 왜 이렇게 가난한 쪽방에서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께서 도시락에 있는 음식들을 못 드시기 때문에 도시락은 대부분 원근이의 식사가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원근이 밥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셨고, 원근이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시기도 하셨다고 했다. 죄송한 마음에 원근이도 가끔 어머니께서 싸주시는 음식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뵈었고, 방 청소도 해드리고, 집안에 고장난 물건도 고쳐드렸다고 했다. 그렇게 원근이는 여섯 달이나 봉사활동을 했다. 할머니의 말씀에서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원근이는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는 것이 행복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리들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지나간 시절의 어떤 기억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왜 이 봉사활동을 자신에게 하게 하셨는지, 점심시간 함께 걸으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강점과 약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난 후, 원근이는 더 이상 봉사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이었다, 원근이는 장례 기간 내내 학교를 마치면 장례식장에 갔고, 마지막 날에는 결석을 하고 할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나에게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원근이의 손에는 종이돈 1000원이 들려 있었다. 할머니께서 빵을 사 먹으라고 주셨던 돈인데 차마 쓸 수가 없어서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언제가 돌려드리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원근아. 그 돈 잘 간직하고 있어라. 평생 간직했으면 좋겠다. 살다가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그 돈을 바라보면서 기준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할머니께서 고민하는 너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지 귀 기울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야. 할머니께서 원근이에게 참 귀한 선물 주고 가셨네. 다 우리 원근이 복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고,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원근이와 진학 상담을 하였다.
“선생님. 자동차 공학과로 진학하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무한 질주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해요. 다만 몸이 불편한 분들을 편하게 모시는 일을 하거나 그런 차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일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동차 공학이 의외로 종합과학이란 것을 알았어요. 친구들하고도 친해졌으니 함께 협동하면서 꿈을 이루고 싶어요.”
“그래. 꿈이 풍성해졌구나. 일단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우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눠보자. 인공지능 관련 분야들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잖아. 의학 분야도 그렇고, 교통 분야도 그렇고. 그렇다면 말이야. 지금 원근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인공지능이 다 대체해 버린다면 원근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 볼게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도 괜찮지. 그렇지만 그때 갑자기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려면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부터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준비를 하면 된다. 역시 유원근은 똑똑해요!”
“예?”
“질문하는 연습을 해보렴. 지금 질문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이 닥치면 우선 질문을 하는 연습을 해보렴. 이런저런 방향에서 질문을 해보고, 친구들하고도 함께 질문을 해보고, 해결 방법이 여러 가지가 나오면 그 방법에 대해 한 단계 더 깊이 질문도 해보고 말이야. 그러다 보면 네가 가야 할 길이 보일 거야.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갈 길도 막막하지만, 가끔 길 끝에 가야 보이는 길들이 있으니까,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말이야. 그리고 음…, 음… 가끔은 무한 질주하며 달려가기도 하고 차가운 얼음을 가르고 나가는 쇄빙선처럼 강하게 나가고…….”
그건 좀 아니라고 말하며 원근이는 크게 웃었다.
“선생님.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 해줘요?”
“네 마음이 너에게 답을 줄 거야. 사람과 상황과 사물의 소리를 듣는 연습 많이 했잖아. 그건 네 마음과 대화를 하는 연습이기도 했어. 네 마음이 들려주는 너의 말에 귀를 기울이렴. 대부분은 그게 답일 거야. 너무 서둘러서 답을 내려고만 하지 말고 말이야.”
원근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원근이는 겉에 보이는 것보다 마음을 읽는 법. 빨리 달리는 것보다 주위를 살피면서 함께 가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한 단계 더 깊게 깨닫는 순간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너에게 한 적이 있는데 말이야. 질문하고 대답할 때, 그리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기준선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있는데 너는 할머니께서 주신 천 원이라는 매우 유용하고 감사한 기준선을 갖고 있잖아. 언제나 너의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시던 할머니를 롤모델로 삼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학과는 잘 선택했다. 우리 원근이에게 잘 맞는 분야가 되겠구나.”
봄에 비해 키가 훌쩍 컸고, 마음은 더 크고 단단해진 원근이. 천천히, 세상을 향해 길 찾기를 시작하는 원근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조금만 더 사셔서 원근이의 스승이 되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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