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앤피뉴스 - [오대혁의 문화비평] 청국장과 커피, 그리고 발효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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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의 문화비평] 청국장과 커피, 그리고 발효의 미학

피앤피뉴스 / 기사승인 : 2024-05-03 12: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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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숙 시 비평
청국장과 커피, 그리고 발효의 미학

 

오대혁(시인, 문화비평가)

 

한 줌 가을볕까지 알뜰히 핥으며
그대들의 비리고 아린 삶 담아내려
무던히 애썼다오 

- 강병숙, 「콩의 변(辯)」 중에서

 


1. 음식과 인생의 발효

음식은 생존과 문명을 보여준다. 음식은 생명체라면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이면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먹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은 유기체로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에너지 공급원으로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일정 수준의 문화로 즐김의 대상이 됨으로써 문명화·인간화의 수준을 드러내며, 삶의 의미를 환유(metonymy) [환유(換喩)는 우리 민족을 ‘흰옷’으로 중국 음식점 배달원을 ‘철가방’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보면 된다. 라캉은 은유를 ‘증상의 매커니즘’, 환유를 ‘욕망의 매커니즘’으로 정의하고 있다.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표를 만들어내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하는 정신의 투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오랜 굶주림으로 급하게 먹다 체한 조밥이 화근이 되어 아내는 병을 앓다가 설렁탕도 먹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하도 배가 고파서 숟가락도 지니지 않은 채 “손으로 움켜서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하더니만” 결국 병을 얻어 죽음까지 이른 것이다. 조밥과 설렁탕은 1920년대 빈민, 나아가 조선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드러내는 환유다.


강병숙 시인은 음식에 대한 시가 여럿이다. 필자가 접한 10편의 시 가운데 「콩의 변(辯)」, 「누름돌」, 「질경이」, 「황제 커피」 등 4편이 음식을 다룬 시이다. 이 시들은 오랜 세월 숙성되어 제맛을 선보이는 음식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도 널리 보아 발효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아닌가 한다.


2. 청국장의 숙성이 갖는 메타포

인간은 선험적으로 음식에 대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가 잉태한 후 섭취하는 음식은 태어난 아이의 몸이 그대로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렇게 먹기 싫었던 된장국이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되살아난다. 그 속에는 유년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 혼란했던 시대나 강렬했던 굶주림과 같은 고통을 수반하여 잠재되었던 무의식이 존재한다. 강병숙 시인의 「질경이」는 ‘질경이 나물’을 통해 삶을 되새김질하는 시다.

입덧이 심해 비실비실 말라만 갔다
사월의 나른한 일요일 오후 토하고 또 토하고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신랑이 울먹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것을 떠올려 봐 하나쯤은 있을 거야
아, 질경이 나물 엄마의 얼굴과 함께 떠올랐다
도시에서만 자란 그이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난감해했다
할 수 없이 차로 동행해 서울 근교 시골 마을로 향했다
다행히 질경이가 무리 지어 있는 오솔길을 찾았다
이렇게 더럽게 짓밟히고 질긴 것을 어떻게 먹는담
투덜대면서도 그이는 한 소쿠리 가득 뜯었다
신이 난 나는 질경이를 삶아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묻혀서
들기름에 슬쩍 볶으니 엄마의 손맛이 그대로 느껴져 입맛이 살아났다
몇 끼를 먹으니 입덧은 거짓말 같이 사라졌고 튼실한 사내아이를 순산했다
그 후로 나는 사월이면 질경이 나물을 보약 삼아 먹고 있다
아들도 유난히 좋아해 꼭 챙겨 먹인다
무참히 짓밟혀도 꿋꿋이 살아나는 생명력 강한 질경이 나물
보잘것없는 꽃대를 세워 종족 보존에도 충실하지
왠지 서민적으로 느껴져 더 살갑다

애련하게 나를 보듬던 풋풋했던 신랑이 이제는 머리 허연 노인이지만
질경이의 질깃질깃한 끈으로 잘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시인은 “더럽게 짓밟히고 질긴” 질경이 나물을 먹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질경이 나물은 ‘엄마’와 함께 떠오르는 대상이다. 들기름에 슬쩍 볶은 질경이 나물에서 ‘엄마의 손맛’이 살아나고, 그것을 몇 끼 먹으니 입덧이 사라져 아들을 순산했다. 그 후에도 사월이면 질경이 나물은 화자가 보약 삼아 먹는 음식이 되었다. ‘질경이’는 “무참히 짓밟혀도 꿋꿋이 살아나는 생명력 강한” 것으로 이해되고, 종족 보존에 충실하며, 서민적으로 이해되면서 화자 자신과 연결된다. 그리고 머리 허연 노인이 된 남편과의 ‘질깃질깃한 끈’이면서 ‘우리의 사랑’이라는 인식으로 확대된다. ‘입덧’은 ‘음식’과 ‘엄마’로 연결되며 여성성을 각인하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어머니 되는 자들이 경험하는 여성과 여성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이 ‘입덧’이다. 그러면서 ‘질경이 나물’은 서민적인 음식이면서 강인한 생명력, 다산(多産)과도 연결되며 화자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로까지 확대된다. ‘질경이 나물’은 물리적 시간을 관통하여 화자의 강렬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콩의 변(辯)」은 콩이 화자로 등장한다. 시인은 콩이 되어 콩이 인간을 ‘부요(富饒)’하려 무던히도 노력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밤새 커다란 고무통 안에서
몸을 부풀려가며 두런거린다
두드득 두드득

한 줌 가을볕까지 알뜰히 핥으며
그대들의 비리고 아린 삶 담아내려
무던히 애썼다오

참혹한 도리깨질로
입었던 옷 다 벗어내고
동글동글 탱글탱글

그대들 환한 미소 앞에
우리는 새로운 꿈으로 가득하다오

아리고 비린 맛을
구수한 맛으로

바실리아균
레스베라트롤 동원해

그대들의 부요를 

- 「콩의 변(辯)」 전문


‘바실리아균’과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이라는 낯선 시어가 등장한다. ‘바실리아균’은 ‘바실러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로 고초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산균이나 효모와 함께 유익한 미생물로 콩의 발효식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청국장의 바탕을 이룬다. 미생물의 번식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청국장 고유의 강한 냄새가 이것 때문에 만들어진다. ‘레스베라트롤’은 콩의 발효 과정에서 나타나는 항암, 항산화 활성 물질로 항당뇨, 항노화, 심장병 예방 등에 좋은 성분이다. 그리고 도리깨질로 입었던 옷을 다 벗어버린 콩이 밤새 고무통 안에서 몸을 부풀린다든가, ‘아리고 비린 맛을 / 구수한 맛으로’ 변화시킨다는 등의 표현등을 통해 콩의 발효, 청국장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콩은 의인화되어 있다. 콩들은 말한다. “한 줌 가을볕까지 알뜰히 핥으며 / 그대들의 비리고 아린 삶 담아내려 / 무던히 애썼다오”, “그대들 환한 미소 앞에 / 우리는 새로운 꿈으로 가득하다오”라며 발효의 상황을 그려낸다. 비리고 아린 삶을 딛고 일어나 성숙해나가는 인생사와 결부되면서 시적 자장을 형성한다.


콩의 ‘숙성(熟成)’과 인간의 ‘성숙(成熟)’은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시련과 고난의 과정을 통해 내부적으로 익어간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성숙을 낳게 하는 외부적 억압을 의미하는 ‘누름돌’이 시적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둥글둥글 모나지 않고 / 반듯하게 다듬어진 품새에 / 꾸욱 꾸욱 눌려 / 비로소 / 갇힌 공간에서 뿜어내는 / 숙성된 맛이 오묘하다”라며 숙성을 낳게 하는 누름돌을 노래한다. 그리고 “들떠 있어 그르치게 되는 많은 것들 / 나는 / 누구의 누름돌이 되어 / 제대로 된 맛과 향을 지켜주었는가”(「누름돌」)라는 반성을 낳게 한다.


그리고 시인은 「황제 커피」라는 작품을 통해 커피와 관련된 고종과 명성왕후를 떠올린다.

ㄱ. 건천궁에서 즐기셨다던
ㄴ. 누룽지 맛의 구수한 커피를 모처럼
ㄷ. 대청마루에 앉아서
ㄹ. 여치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ㅁ. 먼 산에 눈을 두고
ㅂ. 반 모금씩 음미해 본다
ㅅ. 시인 엄마 커피 중독자는 황제 커피 맛을
ㅇ.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한 딸아이가
ㅈ. 저 멀리 군산에서 공수해왔다
ㅊ.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ㅋ. 커피에 상술을 덧붙인 불순한 의도가 싫어서
ㅌ. 타국에서 건너온 검은 빛깔의 차를 마시며
ㅍ.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 걱정으로
ㅎ. 힘들었던 고종께서는 잠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을까
ㄱ. 구수한 이 맛에서
ㄴ. 나는 잠시 건천궁으로 향해본다
ㄷ. 대들보의 위용에 압도당하며
ㄹ. 라디오 축음기 타자기 여러 소품 중에
ㅁ. 명성황후가 좋아했다던
ㅂ. 본차이나 커피잔에 유독 눈길이 간다
ㅅ. 사방을 병풍으로 둘러
ㅇ. 아늑함을 주고
ㅈ. 자연스럽게 비단 방석이 놓여 있다
ㅊ. 처음으로 두 분이 마주 앉아
ㅋ. 커피를 마셨을 때 기분을
ㅌ. 타인인 내가 한 세기를 넘어
ㅍ. 풋풋한 연정으로 느끼는 것은
ㅎ. 황후의 피가 흘러서가 아닐까
- 「황제 커피」 전문

시인은 고종 황제가 마셨다는 ‘황제 커피’를 마신다. 군산에서 공수해 온 구수한 누룽지와 같은 ‘황제 커피’를 마시고 건천궁(乾淸宮)을 찾는다. 그곳은 커피를 좋아했다던 고종, 그리고 본차이나 커피잔을 좋아했다는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공간이다. 시인은 그들 부부가 다정히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떠올린다. 커피는 시인에게 황후의 피가 흘러 풋풋한 연정을 느끼게 만든다는 상상을 낳게 한다.


커피 역시 수많은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청국장이 내뿜는 숙성과는 다른 형태의 시련과 고난을 동반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커피나무에서 커피콩을 수확하여 껍질을 제거하고, 말리거나 습식 처리하여 원두를 만든다. 원두를 고온에서 로스터기로 로스팅하는데, 그 과정에서 내부의 성분은 변화하고 색깔과 향이 형성된다. 커피의 공정 과정은 앞서 본 콩의 숙성과 다르지 않다. 물론 시인은 작품 속에서 거기까지 가 닿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근대사와 연결하여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창출해내고 있다.


3. 발효된 삶의 향기

필자가 들여다본 강병숙 시인의 작품들도 널리 보아 발효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광양 명검」은 함께한 칼과의 인연을, 「이상한 흔들의자」와 「동문서답 요양병원」은 노년의 인생을, 「동피랑 벽화마을」은 낡은 가옥들을 예쁘게 치장한 마을을 다루었고, 「바람의 언덕 제주 수월봉」이나 「휴휴암」은 노년의 깨달음을 잔잔하게 담아냈다.

오늘은 우리가 은퇴하는 날

멀리 광양에서 소를 따라 와
이곳 강남에서 호흡을 맞춰온 지 30년

언 손 호호 녹여가며
한석봉 어머니 심정으로 심혈을 기울여
살점을 얇게 얇게 저미는 일
육즙의 풍미를 위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세 아이 희망의 뜨락에
기도를 심는 일이기도 했어
네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지
매일 숯돌에 너의 날을 아프게 비벼대며
시퍼렇게 깎아 내야 했으니까

희망의 뜨락에서 잘 자란 꿈나무들은
여섯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로 우뚝 섰으니
양 어깨 짓눌렀던 무거운 짐
이제는 가볍게 내려놓고 훨훨 날으리

내 어깨 굽어지고
손가락 관절이 울퉁불퉁 변하는 동안
서슬 퍼렇게 번뜩이던 너도 닳고 닳아
볼품없는 기다란 창칼이 되어버렸네

겉이 깎이는 동안 안으로 삭혀진 희생이
내공으로 쌓여 그 위용은 더욱 빛나니
- 「광양 명검」 전문

시인은 광양에서 만들어진 명검을 가지고 30년 동안 음식을 만들다 은퇴하기까지의 서사를 가전(假傳)처럼 들려주고 있다. 광양 명검과 함께 은퇴하는 날을 맞아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얘기한다. 광양에서 소를 따라 강남까지 와서 30년을 그 명검을 가지고 음식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명검을 이용했던 것은 “살점을 얇게 얇게 저미는 일 / 육즙의 풍미를 위한 작업이고 했지만 / 세 아이 희망의 뜨락에 / 기도를 심는 일이기도 했어 / 네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지”라고 말한다. “매일 숯돌에 너의 날을 아프게 비벼대며 / 시퍼렇게 깎아 내야 했으니까”라며 가족을 위해 명검의 희생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식들을 길러냈다. 하지만 화자의 “어깨 굽어지고 / 손가락 관절이 울퉁불퉁 변하는 동안 / 서슬 퍼렇게 번뜩이던 너도 닳고 닳아 / 볼품없는 기다란 창칼이 되어버렸네”라고 한다. 화자도 명검도 닳고 닳아 볼품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겉이 깎이는 동안 안으로 삭혀진 희생이 / 내공으로 쌓여 그 위용은 더욱 빛나니”라고 찬양된다. 전(傳)의 행적부-평설부와 구성과 같은 형태로 광양에서 올라와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을 길러내고 은퇴하게 된 상황을 명검을 통해 드러냈다. 명검은 곧 화자의 페르소나로 기능하면서 작품이 흥미로워졌다.


이 외에도 그의 시들은 고단한 삶의 여정을 통해 도달한 깨달음을 다양한 시편들로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바람의 언덕 제주 수월봉」은 제주 수월봉을 쳐다보며 아득한 세월을 뚫고 살아온 수월봉과 시인 자신의 삶을 겹쳐 표현한다.

중생대 백악기 아득한 세월
바다 한가운데서 펄펄 끓는 용암이 세 번이나 솟구쳤어요

그 뜨거운 열기가
지금도 지는 해와 손을 맞잡고 난동을 부려요
시뻘건 물감을 태평양 바다 위에 확 뿌려 놓고는
거센 바람에 힘입어
바닷물 하얀 포말과 섞여 요동을 치며
무지개로 퍼지는 모습은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기왓장처럼 켜켜이 쌓인 융회암 절벽에
처얼썩 파도가 부딪혀 오면
바람의 언덕은 더 신이 나서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바람을 쏟아내며
바위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대요

수월봉은
그렇게 수월한 봉우리가 아니에요
요동치는 세찬 바람에 맞서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겸허히 몸을 낮추고 기다려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어요

일몰을 머리에 베고 잠들었더니
나는 이미 백 년을 살아 버린 거예요

아, 세상사도
겸허히 몸을 낮추고 기다릴 줄 알아야
수월하게 일이 풀리고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군요 

- 「바람의 언덕 제주 수월봉」 전문

 

화자는 “중생대 백악기 아득한 세월 / 바다 한가운데서 펄펄 끓는 용암이 세 번이나 솟구쳤어요”라고 제주 수월봉을 그려주면서 “지금도 지는 해와 손을 맞잡고 난동을 부려요 / 시뻘건 물감을 태평양 바다 위에 확 뿌려 놓고는”이라며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과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바람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화자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몰”로 인식되는 수월봉 일몰 다음의 표현은 절창이다. “일몰을 머리에 베고 잠들었더니 / 나는 이미 백 년을 살아 버린 거예요”라고 무상한 인생을 한순간에 시적으로 그려낸다. 그리하여 오도송(悟道頌)과 같은 표현 “아, 세상사도 / 겸허히 몸을 낮추고 기다릴 줄 알아야 / 수월하게 일이 풀리고 /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군요”라고 한다. ‘겸허’나 ‘낮춤’을 그 누가 모를까? 다섯 살 아이도 알고 미수(米壽)를 맞은 노인도 모르지 않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 지이행난(知易行難)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삶이 발효되어 풍기는 향기는 구수하면서도 은근하다.

 

강병숙 시인의 시집 『옥수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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