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이나 심리학보다 네가 크다
문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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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전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1학년 여름 방학 때 학원을 바꿔 달라고 하기에 그냥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때부터 반항인지 학원을 아예 다니지 않아버렸어요.”
“준범이가 그랬군요. 어머님 마음이 무척 힘드셨겠어요. 아버님도 알고 계셨나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본인 선택이니까 존중해 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하고요.”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준범이는 뚱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명랑하고 나서기를 잘하는 모습과는 영 다른 준범이가 우리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치 아주 크고 강한 방패를 들고 있는 병사처럼 보였다.
“의대 진학 가능성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겠지만 의대가 한 끗 싸움이어서 지금 성적으로는 조금 불안하긴 하네요. 이럴 땐 제 경험상으로 가장 불편한 경우를 예상하고 계획을 짜는 게 좋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혹시 준범이 성적이 고3이 되어서도 의대로 진학하기에 부족하다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재수라도 해야지요. 삼수, 사수라도 해야지요. 머리가 나쁜 놈도 아니고, 본인이 의대를 진학하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해야지요. 저도 그렇게 끈기를 갖고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굵고 낮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다른 이가 접근하기 어렵게 철책을 치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준범이는 방패를 꼭 붙들고 있었고, 아버지는 철책을 쉼 없이 두르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셨다. 준범이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준범이 아버지가 의사가 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은 준범이를 위해 쏟아붓고 싶다는 이야기 끝에 살짝 울컥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준범이는 하품을 자주 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DISC(성격행동유형) 검사지를 세 사람 앞에 내어놓았다.
“부모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 검사지를 작성하고 상담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준범이와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고 난 뒤 다시 부모님과 만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아버님과 둘이 상담했으면 좋겠습니다.”
검사 결과 아버지와 준범이는 주도적인 성향인 강한 D형이 나왔고, 어머니는 안정을 추구하는 S형으로 나왔다.
“그냥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다시 성적 올릴 자신 있어요.”
“좋아. 좋아. 체력은 국력이지. 그래 남자는 힘이야! 하준범! 씩씩해서 좋다! 그런데 부모님과 상담할 때는 왜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니?”
“결과로 보여드려야죠. 아빠처럼 일방적으로 말하고, 엄마처럼 절대 자기 의견 포기하지 않는 분들하고는 이야기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행동으로 분명하게 보여 드리려고요.”
“오케이! 준범이 완전 상남자 인정! 근데 완전히 선생님 혼자 소설 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싶은데 한 번 받아 볼래?”
“들어오세요. 얼마든지. 제가 받아드릴게요. 헤헤.”
“너 왜 아버지 싫어하니?”
“어? 훅 들어오시네요. 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건요. 아빠가 너무 자기 위주라서요. 뭐라고 할까요. 그런 걸 권위적이라고 하나요? 저도 알아요. 아빠가 존경받을 만한 분인 거 잘 알아요. 그래서 어릴 때는 아빠가 제일 자랑스러웠어요. 의사가 되고 싶은 것도 아빠 영향이 커요. 그런데요. 점점 아빠가 저에게 너무 많은 명령을 했어요. 부모님이니까 그런 건 알겠는데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까지 자꾸 건드리니까 너무 불편했어요. 이번에도 그래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선생님께 상담하자고 해서 저를 쪽팔리게 만드셨잖아요.”
“언제부터 아버지가 미웠니?”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 아! 그러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러네요. 그때부터였네요.”
“할머니와 아버지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니?”
준범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나는 차를 끓였다. 준범이가 나에게 선물해 준 홍차였다. 평소 준범이는 홍차 전문가였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끓여주신 홍차가 늘 생각이 난다고 했던 친구였다. 물끄러미 홍차를 바라보다 찻잔을 감싸 쥐면서 준범이가 말했다.
“초등학교 때도 저는 아빠에게 서운한 것이 많았어요. 그래도 아빠가 너무 무섭고 완벽하게 보여서 아빠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아빠 흉을 많이 보았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어요. 그리고 옛날 아빠 초등학생 때보다 제가 더 뛰어나다고 하셨어요. 얼굴도 잘 생기고 성적도 더 좋고, 그러니까 이다음에 아빠보다 제가 더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 흉을 마음 놓고 볼 수 있었구나. 아버지는 늘 같은 모습을 보이셨는데 할머니가 계실 때는 견딜 수 있고, 아니 오히려 힘을 얻을 수 있었구나. 그랬구나.”
준범이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자. 준범아. 우리 편안하게 이야기 나눠보자. 아버지 말씀처럼 재수하고 삼수하고 난 뒤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선생님. 저 재수 안 해요. 그건 아버지 생각이에요.”
“그래. 그래야지. 나도 재수하지 않는 것에 한 표! 일단 의대 목표로 가보자. 그런데 만약 성적이 안 나오면 지원할 다른 학과를 하나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겠니?”
“어느 과요?”
“너 왜 의대에 가고 싶니? 아버지와 관련된 내용 빼고 말해볼래?”
“뇌가 궁금해요. 할머니가 치매 걸리셨을 때 정말 슬펐거든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그렇구나. 선생님이 네 적성검사 자료와 세부능력 특기사항들을 살펴보니까 의학과 비슷하게 심리학이 너에게 맞는 학과라는 분석을 하게 되었어. 심리학과는 네 성적으로 도전해 볼 만하고 말이야.”
“어? 실은 저도 심리학과 생각 자주 했어요. 인공지능이 심리학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어봤는데 재미있었어요. 뇌와 마음의 관계도 알아보고 싶고요.”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심리학책을 꽤 많이 읽었나 보다. 그럼, 심리학과 진학에 대해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눠볼래?”
준범이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빠에게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왜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잘 모를까?”
“깊은 이야기를 길게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아빠가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실까도 걱정도 되고요.”
“아버지가 왜 네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예?”
“나는 지금 준범이의 말이 아버지께서 네 말에 무조건 동의해 주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말로 들리네. 준범아, 우선은 말이야. 네가 아버지에게 너의 의견을 말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버지가 네 생각과 다른 말씀을 하셔도 용기를 내서 대화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자신 없어요. 제가 용기도 없지만 아빠가 제 이야기를 안 들어주실 꺼에요.”
“그렇구나. 그래 힘들 수도 있겠다. 자, 그럼, 흑기사가 등장해 볼까?”
“선생님이 아버지랑 이야기하시려고요?”
“선생님이 중간 역할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준범이 아버지와 만났다. 준범이 아버지가 쓴 시집을 선물 받았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의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그래도 나중에 등단하여 시인의 꿈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제자들과 지낸 이야기를 담은 나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는 동갑이었다. 책, 동갑, 그리고 아버지라는 공통점 덕분에 우리는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준범이가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깊게 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우리 아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만의 판단이었군요. 소통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네요.”
준범이 아버지에게 DISC 검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준범이가 주도형이고 준범이 어머니가 안정형이어서 서로 어울리기 쉽지 않은 성격유형이라고 설명했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안정형인 어머니는 준범이가 같은 학원을 계속 다니길 원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는 준범이는 자기 뜻을 굽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기도 싫어서 아무 학원도 다니지 않는 중간 지점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준범이는 반항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역시 주도형이어서 준범이와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성격유형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버님. 큰 D와 작은 D가 충돌하면 누가 양보해야 할까요? 더 많이 사랑하는 D가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큰 D는 어느 순간부터 작은 D를 끌고 가기보다는 뒤에서 돌봐줄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준범이 아버지는 짧은 침묵에 잠기셨다. 그동안 나는 병원 창밖에 막 피어나고 있는 목련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울컥하는 감정을 다독거렸다. 나도 준범이 아버지처럼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으니까, 나도 준범이 아버지처럼 자식들이 세상에 나갈 때 바라만 보는 시간과 만난 애비였으니까….
준범이 아버지에게 준범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시길 부탁드렸다. 가능하면 준범이가 말하고 난 뒤에 말씀하시고, 가능하면 아버지의 고민도 준범이에게 이야기하면서 준범이와 대화를 나누시길 바란다고 하였다. 여행도 다니고, 스포츠 경기도 관람하시고 영화도 함께 보시고 콘서트도 다니길 권하였다. 준범이 할아버지와 나누지 못한 시간들을 준범이와 나누시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들로 만나면서 친구 같은 부자지간이 되시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준범이는 명문대학 심리학과로 진학하였다. 나는 준범이에게 짧게 편지를 써서 졸업식 날 건넸다.
“의학이나 심리학보다 사람이 크다. 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학이나 심리학보다 네가 크다.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그런 존재다. 사람을 그런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이런 선생님의 마음을 잘 간직하면서 마음 공부를 시작하길 바란다.”
문경보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교육전공 졸업
서울시교육청학부모지원센터 학부모교육 강사
자기주도학습 코칭전문가
문청소년진로연구소 소장
한국독서치료연구소 부소장
대광고등학교 진로진학 컨설턴트
서울 YWCA 청소년부 자문위원
한국 인성 교육협회 위촉교수
前 중동 중학교, 대광 중고등학교 국어교사
대광 고등학교 진로 교사, 상담실장, 생활관장
영락 고등학교 심리학 강사, EBS 출연교사
저서 「외로워서 그랬어요」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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