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고은의 작품>
엄마를 사랑한 투덜이 스머프
장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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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호성이와 진학 상담을 하는 시간. 문과 1등급 중에서도 최상위권 학생. 다른 학생들이나 친구들 앞에서 늘 일그러진 표정을 으며 투덜거리는 말을 해서 투덜이 스머프란 별명으로 불리는 친구. 나는 말없이 호성이의 입 앞으로 젤리 사탕을 건넸다. 우습게도 호성이는 젤리 사탕으로 날름 입으로 받아먹었다.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잠깐이지만 마치 아주 어린 아이의 미소를 지은 호성이의 얼굴은 무척 귀여웠다.
“너 왜 국어교육학과로 진학하려고 하니?”
“아, 참. 지난번에도 물어보시고 또 물어보세요? 말씀드렸잖아요. 고1 때 선생님이 쓰신 책 읽고 필 받았다구요.”
“음. 언제 들어도 그 말은 참 기분 좋은 말이다.”
“선생님. 저랑 상담하는 거 우리 엄마가 시킨 거 맞죠? 엄마가 학부모 대표니까 저에게 특별히 신경 쓰시는 거 맞죠?”
“우리 투덜이 스머프는 모르는 게 없어요. 그래. 학부모 대표 아드님이시니까 특별 대우 해드리는 거 맞습니다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시키신 것은 아니고 내가 알아서 기는 거야. 어머니께서 학교 일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다. 솔직히 이야기할게. 아들놈이 엄마 학교 오는 싫어서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네 어머니께서 학교 일에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면 안쓰러워서 내가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너랑 상담하는 거야. 어떻게 만족한 대답이 되셨나?” “선생님이 학생들을 그렇게 편애하시면 안되죠. 에이 참. 또 우리 엄마 이야기로 돌아가네. 저 갈래요.”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언제부터 투덜이 스머프가 되었니? 애들 얘기 들어보면 너 중학교 때 그렇게 잘 웃고, 잘 웃기는 아이였다고 하던데. 공부는 지금보다 별로였던 것 같고.”
“맞아요. 고등학교에 와서 짜증이 늘었어요. 중학교 때는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았거든요. 엄마가 운영하는 학원에 신경 쓰느라 올 시간이 없었어요. 그때는 참 좋았는데. 선생님. 이번엔 진짜 가겠습니다.”
“투덜이 스머프! 다시 한 번 선생님 기분 좋게 해줘. 왜 국어교육학과로 진학하려고 한다고?”
“아, 참! 저는 국어교육학과를 나와서 선생님처럼 학생들과 친구 같은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에요. 됐죠?”
최호성. 불편한 감정을 잘 드러내면서도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줄 알고, 솔직하고, 표현력도 뛰어나고, 공감 능력은 아주 뛰어난 친구. 거기다 우수한 성적. 자신이 원하는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고, 국어교사가 될 기본 자질을 잘 갖추고 있는 학생.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마음에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응어리를 풀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장면 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어요. 호성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입 국어 학원에서 강사 일을 시작했어요. 밤낮없이 뛰었어요. 늘어나는 빚을 해결하려면 밥 먹는 시간도 아껴야 했어요.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오면 방 한쪽 구석에 어린 호성이가 자고 있었어요. 호성이의 눈에는 눈물자국이 있었고, 제 눈에선 눈물이 흘렀어요. 아침마다 ‘엄마 언제 와?’하고 호성이가 물어볼 때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언제부터인가 제가 출근할 때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았어요.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운이 좋아서 빚도 다 갚고 자그마한 학원도 제 이름으로 차리게 되었어요. 호성이는 벌써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구요. 고등학생이 된 호성이에게 그동안 못했던 에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 일도 열심히 도와드리고 호성이 공부도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호성이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었나봐요. 잘 웃던 호성이는 늘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제가 학교에 오면 저를 노려보곤 했어요. 학교에서 호성이를 만날 때는 겨울 찬바람에 따귀를 맞는 기분이었어요. 어느 날은 저에게 그러더군요. ‘엄마. 학교 애들 엄마네 학원으로 끌어들이려고 오는 거지?’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어요. 다행히 선생님들께서 애써 주셔서 좋은 성적이 나오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저와는 남남이 되어버린 기분이에요.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별 이야기를 다 하네요.”
의문이 풀렸다. 호성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중학교는 어머니가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세상으로 나가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분리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진로 탐색기인 중학교 시절에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평안을 느끼던 자신의 영역에 어머니가 등장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고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호성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다시 움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 어머니가 자신을 팽개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이 호성이에게 분노를 만들어내고 늘 투덜거리게 했을 것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를 떠나는 준비를 해야 하는 고등학교 시절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분리불안의 심리가 뒤엉켜서 나타나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호성이는 엄마가 없는 세상을 만나게 될까 봐, 엄마와 헤어지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경험을 또 하게 될까 봐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투덜이 스머프가 엄마에게 보이는 쌀쌀함 밑에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은, 엄마를 깊게 사랑하는 여린 아들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호성이에게 참 많은 선물을 주셨네요. 우선 국어교사가 되기에 아주 좋은 우월한 유전자를 주셨구요. 거기다가 공부 훈련까지 전문적으로 잘 시켜주셨구요. 제가 호성이 간단 검사를 해보았는데요. 호성이가 사람을 많이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호성이가 왜 사람을 다루는 교사가 되고 싶어할까?라는 질문에 제가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겠네요.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는데 못 이룬 것들을 다른 이를 통해 이루면 행복을 느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어머님께서도 잘 아실 거에요. 호성이는 돌봄을 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 덕분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돌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된 듯싶네요. 어머니께서는 상처라고 생각하신 시간들을 호성이는 귀한 선물로 승화시켰네요. 참 멋진 아드님을 두셨네요. 어머니께서도 충분히 좋은 어머니 역할을 하셨고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쩌면 이런 상황들은 호성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보냈던 어머니의 시간들이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장면 셋
호성이는 명문대 국어교육학과에 여유 있게 합격했다. 나는 호성이게 글씨를 선물했다.
‘겸손과 인정’
그리고 어머니와 나눴던 이야기를 그대로 호성이에게 전달했다. 선생님만의 생각일 수도 있으니 잘 여과해서 새기길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어머니의 생활방식이 너를 힘겹게 했지만, 그것이 너를 꿈꾸게 했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이 다음에 학생들과 생활할 때 너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판단할 때 불편하고 화가 날 일이 발생했을 때 어린 너를 집에 두고 직장에 나가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스승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아파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 너의 제자들이 아픔을 선물로 승화시키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 친구 최호성이가 내게 보여 준 기적처럼이라고 말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호성이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께 제 마음 들켜버렸네요. 저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럼 더 아플 것 같아서요. 그런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늘 짜증이 났고요. 우리 엄마, 고생 참 많이 하셨거든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는 엄마랑 잘 지낼게요. 아! 그리고 선생님. 젤리 하나 입에 넣어주세요. 선생님과 만날 때 그게 제일 좋았어요.”
스무 살이 시작되는 이월. 졸업식을 마친 호성이가 꽤 괜찮은 시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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