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빈집
오대혁(시인, 문화비평가 | 논설주간)
천년 오르고 오른 계단 꼭대기에는
겨울밤 너머 지붕들 위에 잿빛 눈
몸서리치며 어둠은 가루눈 이불을 덮고 있다
제삿밥 먹고 돌아오던 이십 리 눈길
간절한 기도 끝에 새벽 절간 내리던 눈송이
지미봉 앞 갈대들이 몸 비벼 수런거리던 눈의 소리
그녀의 볼우물을 타고 흐르던 눈물 송이
기억을 끄집어 삶이 풍요로울 수 있다면
자국눈 섞어 치는 밤이 지치지도 않을 테지만
기억을 끄집어 죽음이 섧지 않을 수 있다면
어둠에 옹송그리며 떨던 눈들은 다시 시들 테지만
까무룩 잠들기 시작한 어머니 추억도 어딘가에 멈춰 설 테지만
나는 눈송이들과 대화마저 잊은 채
하루처럼 천년을 스쳐 지나오고선
빈집과 마주하며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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