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 엽서
김 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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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학원에서 하숙집으로 돌아온 내게 대문을 열어주고 안방으로 종종걸음 치는 뽀얀 얼굴의 상큼한 몸매가 예뻤습니다. 그러나 순간의 일이어서 내가 무슨 환영을 봤던가하면서 멍했습니다.
마실 나갔던 주인아주머니가 돌아오면서 내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도청소재지의 여학교에 다니는 동생이며 나처럼 2학년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 근무하는 주인아저씨가 퇴근한 저녁식사 시간에는 내게 격리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지금껏 안방에서 두리반 식사를 같이 하던 내가 독상을 받으면서 내 방으로 쫓겨난 것이지요. 그렇지만 또래의 예쁜 여학생과 한 대문 안에서 지내게 된 것이 도리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녀가 내 옆방으로 들면서 밤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전등불빛을 쐰다는 사실 또한 싫지 않았습니다.
그때 양쪽 방에서 같이 쓰도록 설치된 형광등을 어떻게 끄고 켰던지 기억에 없습니다. 해가 지면 들어왔다가 자정에 저절로 나가는 소위 일반선이어서, 스위치도 없지 않았나 싶네요. 전기료도 등 하나에 얼마씩이면서 백열등은 30촉으로 규제되던 시절이었거든요.
가끔 마주치면서도 소통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땅만 보면서 스쳐 지났고 나로서는 말을 걸 구실도 숫기도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눈이 펑펑 내리는 밤의 늦은 귀가였습니다. 대문을 노크하자, 언감생심 그녀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내 앞에 섰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혀가 얼어붙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덧옷을 걸치고도 허옇게 드러나는 목덜미며 붕긋한 가슴이었습니다. 아니면 눈 오는 밤의 가등 불빛이 눈이 멀도록 부셨던지요.
그녀의 방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한숨만 내뿜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로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척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용기로 방문을 노크해 봤지만 눈 오는 한밤의 정적뿐. 뒷산 눈밭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통금이 엄격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렇다고 그냥 예사로이 잠자리로 들기에는 내가 너무도 못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녀의 안중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일전의 일도 그랬지요. 극장에 간다는 언니와 함께 내 방문 앞을 지나는 그녀의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긴 코트에 모자까지 갖춘 차림은 완벽한 숙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 비해 까까머리 내 모습이 턱없이 초라했고요.
이래저래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작심이었습니다. 단, 내년에 내가 서울의 국립대학을 너끈히 합격했다는 소식에 후회는 하지 말라는 오기는 있었지요.
3학년 여름방학 때는 대문이 열려있었고, 안방 섬돌 위의 남색 운동화가 눈에 익은 모습이었습니다. 당혹스러우면서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뿐인 집안에 있기는 불편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나를 하숙집으로 잡아끌었습니다. 그러고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따지더군요. 귀한 손님이 왔으면 인사를 시켜야지 서로 불편하게 지내게 해서야 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아주머니가 미안하다고 웃으면서 그녀를 포함한 세 사람을 마루 위로 올라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물을 먹는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감탄이었습니다.
그래봤자 가끔 주고받는 “안녕하십니까?”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주인아저씨의 안전에서는 금물이었고요. 그러면서 입추가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등산에서 쑥부쟁이며 몇몇 들꽃을 꺾어왔더니 그녀가 살짝 귀띔하더군요. 꽃을 툇마루에 두고 학원에 가라고.
오후의 방안이 환했습니다. 그녀의 꽃꽂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방 청소도 그녀가 하는 것 같았습니다. 솜씨가 대단하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앞으로는 내 국어사전의 마지막 갈피를 비밀 우편함으로 교신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지요. 그러자 그날 오후의 책갈피로 답장이 와 있었습니다. 꽃꽂이는 여학교의 가사 시간에 배운 것이지만 솜씨는 못된다면서.
그렇게 열린 비밀의 통로였습니다. 내가 수원에 있는 국립 농과대학을 나와서 목장을 하는 것이 장래 희망이라고 쓰면, 자신은 음악에 소질이 조금 있어서 지금 브라스밴드의 컨덕터를 맡고 있으며 그곳 여자대학의 기악과로 진학하게 되리라는 답장이었습니다. 그러자 늘씬하고 화려한 그녀의 악대반장 차림이 한강 이남의 유일한 4년제 여자대학이라는 그곳의 플라타너스 길과 겹쳐지면서 감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길지는 앉았습니다.
처서가 지나면서 방학이 끝을 보이던 날이었습니다. 이제 곧 돌아가야 하므로 방 청소를 언니에게 넘겼으니 더는 꽃꽂이를 할 일도 편지를 받아볼 일도 없다는, 소위 절교선언이었습니다. 뭐라고 흠잡을 데 없으면서도 면도날을 숨긴 것 같은 그녀의 표변이 의아했습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하숙집을 다녀간 여학생 때문인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의 방문은 서울에서 친구들이 보내주는 일본대학의 수학입시문제를 내게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아저씨도 인정하고 허용한 일이었지요. 서울에서 공부하는 내 친구의 사촌이면서 여학교의 진학 서클을 대표한 심부름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면서도 그 여학생이 내 방으로 들어올 때면 방문을 열어둔 채, 윗목과 아랫목으로 최대한 떨어져 앉는 범절이었습니다.
공부만 좀 할 뿐, 예쁘지도 않으면서 나이도 한 살 어린, 친구의 여동생과 나 사이를 맘대로 상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공박이 더해졌습니다. 주인 내외가 잠든 야밤이면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듯, 이상한 노래까지 부르면서 말이지요. 연인을 떠나보내면서 행복을 빈다는 내용의 ‘라 노비아’란 서양 노래며, 떠날 때는 말없이 가겠다는 가사의 유행가까지, 당시 나로서는 생소한 노래들이었지요.
부르다가 적발되면 퇴학까지 당하는 유행가를 거침없이 불러대는 그녀가 놀라웠습니다. 악대반장 정도면 다 그런가 싶긴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나를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해명 내지 항의의 절차는 꼭 있어야 한다는 오기였습니다.
학원에서 조금 일찍 돌아온 하숙집에 그녀가 마침 혼자였습니다. 할 말이 있다면서 안방 문을 흔들었지만 그녀의 저항이 완강했습니다. 어디를 감히 들어오느냐고 나를 불량학생 취급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힘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아랫목 이불 속으로 웅그리며 숨는 그녀를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따귀를 후려쳤습니다. 그런 다음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내 방 구석에서 떨고 있는 내 모습이었고요. 그녀가 일러바칠까 겁나면서, 그것보다는 그녀를 어떻게 다시 볼까 진땀이 났습니다.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보드라운 그녀의 감촉이 자꾸 감돌더군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방문을 나선 이튿날 새벽이었지요, 마침 마당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던 그녀가 지금껏 없었던 환한 미소로 목례를 보내왔습니다. 그대로 꿇어앉아 미안하고 고맙다면서 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뒷산을 다녀왔을 때, 밥상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온 주인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동생이 오후 기차로 떠난다고. 내가 용기를 내어 물었지요. 기차표를 내가 끊어도 되겠느냐고. 그러나 아주머니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고요.
학원의 오후 수업을 빼먹으면서 역으로 나가서 표를 사고 기다리던 잠시에 그녀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언니와의 동행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둘만의 기회가 싹수부터 글러버린 데다 내 주머니 속에는 편지봉투도 들어 있었거든요. 진정 나를 경악시킨 것은 주인아저씨의 출현이었습니다. 시청에 계셔야 할 어른이 자매의 백여 미터 뒤에서 광장을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잡아채어 차표와 봉투를 쥐어주고는 옆문으로 줄행랑칠 밖에요.
그날 저녁 주인아저씨의 퇴근이 늦었습니다. 늦은 귀가는 언제나 약주의 취기였지요. 통금 직전에 대문을 들어서는 아저씨가 고래고래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던 듯, 달려 나간 아주머니가 안방으로 끌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르신이 너를 내게 맡기신 것은 밥이나 먹여서 학교에 보내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제는 어르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단 말이다.”
또 한 번 선잠으로 뒤척이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두리반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아저씨는 겸연쩍다는 듯 웃으실 뿐,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밤새 아주머니가 힘을 쓰신 것 같았습니다. 역시 나는 좋은 어른들과 지낸다면서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마지막 학기와 함께 그곳 작은 도시의 내 시간이 저물었습니다. 그녀에게 장담했던 농과대학 대신 해양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면서 잊어진 것이지요. 더구나 부산에 있는 그 대학은 군사 사관학교와 같은 특차의 입학전형이어서, 전기의 일반대학들이 시험을 치기도 전에 가 입교라는 이름으로 소집되어 맹렬한 훈련을 받거든요.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도청소재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와 일주일여의 제주도 무전여행을 다녀와서 그의 자취방에 들어섰을 때였지요. 누가 봉창을 두드린다면서 밖으로 나갔던 친구의 여동생이 들어오면서 어떤 여자 분이 나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였습니다. 큰길에서부터 뒤따랐다고 했습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따라간 끝의 어느 대문이었습니다. 식구들이 휴가를 떠난 작은 언니네 집이라 했습니다.
그녀가 받아주는 대얏물로 세수를 하고 평상에 앉으면서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흐릿한 백열등과 포도넝쿨의 그림자로 일렁이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습니다. 반갑다면서 웃고 있었지만, 2년 전의 그 몸매며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지난날의 면모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내가 해양대학으로 진학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물어볼 일도 아니었습니다. 펑퍼짐한 허드레옷 차림이 그렇더군요.
언제 한 번 주말에 부산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젓더군요. 내 눈에는 자신을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면서 말입니다.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녀 또한 기진맥진 지치고 남루한 내 모습에 그랬던 것인지요.
이튿날 아침 10시에 로터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내 눈과 혀를 마비시키면서 가슴을 뛰게 했던 그녀의 진면목을 밝은 날에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12시가 지나있었습니다. 로터리로 뛰쳐나갔지만 그녀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친구의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어제의 밤길을 되짚으며 온 동네를 뒤져봐도 허사였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에 다닥다닥 늘어선 단층 한옥들의 그 대문이 그 대문이었습니다.
예순 해가 되어가는 일입니다. 새삼 그립다거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때 그녀가 적잖이 마음 상했을 일을 저지르고도 진작 다독이지 못한 자책의 멍울입니다.
언젠가는, 그녀가 나를 알아봤듯, 내가 그녀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주말에만 허용되는 외박에 친구의 자취방을 자주 찾았고, 해군의 초급장교 시절에는 거의 매 주말이다시피 그곳 도청소재지의 지인들과 어울렸거든요. 그럴 때면 키가 크고 얼굴빛이 환한 여자들을 살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과 함께 일상에 파묻혔던 생채기가 요즘 들어 욱신거립니다. 이제 용서를 빌 시한마저 촉박해져 간다는 것일까요.
소년 시절에 읽은 변 영로 시인의 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끄럽지 않은 곳에서 미끄러져”라는 구절이었지요. 이제야 그 의미를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친구의 부친상에 갔더니 일본의 대학입시 문제를 들고 내 하숙을 드나들던 그 여학생이 나만큼 늙은 할머니로 와 있었습니다. 여럿 좌중에도 스스럼도 없이 말하더군요. “내가 그때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라고.
렌, 우리 모두는 미끄럽지 않은 곳에서 조금씩 미끄러지면서 살고 늙어 가는 것인지요. 세모의 난필이 길었습니다. 새해에도 강령하소서.
김문호
한국해양대 졸업
대한해운공사 선장
한일상선회장
한국문협 해양문학 연구위원장
수필집 윌리윌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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