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앤피뉴스 - [古典의 향기] 원악유배지(遠惡流配地) 대정고을 - 오대혁(시인,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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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의 향기] 원악유배지(遠惡流配地) 대정고을 - 오대혁(시인, 문화비평가)

/ 기사승인 : 2019-06-13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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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JPG
 
 

동계 정온유허비(桐溪 鄭蘊遺墟碑)/추사 김정희적거지(秋史 金正喜跡居址)

 

서귀포에서 40여 분 거리에는 대정고을이 있다. 이곳은 제주목, 정의현과 함께 조선조 태종 16년(1416) 도안무사(都按撫使) 오식(吳湜)과 전판관(前判官) 장합(張合)의 건의에 따라 현으로 나뉘어졌다. 현재 대정고을은 보성, 인성, 안성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안덕면과 경계하고 있고, 대정읍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중심으로 들어서면 동남쪽에 단산(單山), 동쪽에 웅장함을 자랑하는 산방산, 서쪽에 모슬봉, 서남쪽에 일제시대 말엽 세워졌던 비행장의 흔적이 남아있는 송악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대정고을은 나라의 끝이나 땅의 끝쯤으로 여겨졌던 탓인지 원악유배지로 유명하며, 위에 열거했던 유배자의 삼분의 일 가량이 이곳에 안치되어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중 오현(五賢) 가운데 한 사람인 정온과 조선 후기 시‧서‧화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의 유적이 남아있다.

 

나는 정온선생의 유허비가 있다는 보성초등학교를 찾았다. 대정 성곽을 지나쳐 보성리 끝자락에서 오른쪽으로 차를 돌렸다.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학교 앞에는 꽤 많은 승용차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 청년들이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골목을 걸어 들어가니 보성초등학교가 보였다. 운동장에는 마을 청년들이 일요일을 맞아 체육대회를 열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막도 치고 술상자도 즐비하게 늘어놓고서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젊은이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듯했다.

 

정문 옆쪽을 보니 병설 유치원인 듯 예쁜 판박이 그림들이 창문에 붙여져 있고, 그 앞에 여러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비석들 맞은편에 무궁화꽃나무 틈바구니에 내가 찾던 비석이 나타났다. 15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을 안고 늙수그레한 그 비석은 2m 가량 되는 크기에 붉게 칠해진 글씨로 ‘동계 정온선생 유허비’라 쓰여져 있었다. 뒷면을 보니 제주목사 이원조의 비기가 새겨져 있었다. 관광객들이 드나들도록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밝은 가을 햇살 속에 정온 선생의 채취를 스산하게 느끼고 있었다. 

 

정온은 광해군 6년(1614년) 8월에 영창대군을 죽인 정광(鄭光)과 폐모론을 탄행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정현에서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인물이다. 광해군이 대북파의 흉계에 말려들어 불과 아홉 살밖에 안된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서 강화섬으로 유배시키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정온은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항을 치죄하고, 영창군을 대군으로서 후하게 장례치러야 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 틈에서 환관과 궁녀들의 국정 간섭을 금하지 못했던 광해군은 상소문을 읽고 난 후 정온을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시켰던 것이다. 흐트러지는 나라를 올곧게 세우기 위해 직간을 한 까닭에 그는 인조반정 때까지 9년 동안 대정현에 적거(謫居)하면서 가지고 온 경사(經史)를 읽고, 제주섬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유배인으로서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의 굳은 절개를 지키며 제주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시를 지어 남겼다. 다음의 오언 율시 <촌녀저가(村女杵歌)>는 새벽녁 방아를 찧으며 제주 여인들이 부르는 민요를 들은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이 지방에 쌀 찧는 물방아가 없어

마을 아낙네 절구노래 부르네

높고 낮음의 가락이 있고

끊일 듯 이을 듯 서로 어울리는 듯

알 수 없어 통변에게 물었더니만

자주 들음에 차차 웃질 않고

처량히 새벽달에 잠 못 이루니

귀양온 나그네 머리만 세누나

 

마을 아낙네들이 새벽녘까지 노동요를 부르는데 끊일 듯 이을 듯 흥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리다. 가난에 쪼들린 아낙들이 눈 부칠 시간도 없이, 한 서린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 곡조를 듣는 정온은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져 통변에게 ‘왜 저런 노래를 부르느냐’고 묻지만, 그 곡조를 자주 듣게 되니 제주 여인의 고단한 삶의 의미를 차차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머나먼 섬나라에 귀양을 와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이 외에도 정온의 한시 중에는 바람과 눈이 흩날리는 밤 포구에 던져져 있는 어린 아이의 시체를 보고, ‘눈물을 금하려하나 도리어 눈물이 뿌려진다’라며 대정 고을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린 <아시구재포구측연지(兒尸久在浦口惻然悲之)>라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섬사람들은 험한 기후와 척박한 땅을 일구어야 했고, 몽고의 지배와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탈 속에서 제주섬을 지켜가야 했다. 게다가 탐학한 관리들의 민폐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섬사람들은 고통스런 삶을 인내하기 위해 민요를 부르고, 지배 세력에 대한 저항의 설화들을 창작하였다. 귀양 온 사람들은 자신의 불운한 처지만을 눈물겨워만 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보았듯 유배지 섬사람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안타까워하였던 것이다. 

 

수선화를 사랑한 추사

 

경운기 위에는 농약을 푼 커다란 통이 있었다. 수건을 둘러쓴 아주머니는 물통 속을 기다란 막대기로 휘휘 젓고, 아저씨는 줄을 당기며 밭으로 어그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경운기는 탈탈거리며 길게 늘어진 호스에다 농약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감귤 과수원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보니 밭농사를 주로 하는 모양이다.

 

추사 적거지를 찾아 들어서려니 대정 성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황토 빛깔의 묵중한 돌들을 다듬어 쌓아놓은 이 성곽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종 18년(1417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의 둘레가 안성, 보성, 인성리 일원에 걸쳐 4890척이며, 높이가 17척 4촌이고 원래 네 개의 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는 동, 서, 남 세 개의 문으로 되었다고 한다.

 

추사 적거지는 전면에 추사관(秋史館)이 서 있고, 뒤편에 추사가 유배기간 중 가장 오래 거주하였던 대정읍 안성리 강도순(姜道淳)의 집을 복원한 다섯 채의 집이 놓여 있다. 1983년 12월에 시공하여 1984년 5월에 준공된 추사 적거지는 처음에 부지면적을 2000평 규모로 예정하였다가 예산 부족으로 571평으로 축소되어, 커다란 규모는 아니되 소박하게 지어졌다. 물론 그 규모의 크고 작음에 따라 추사를 흠모하는 정도가 판가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추사 적거지에 대한 안내 책자 하나 제대로 비치되어 있지 않고, 이문거리니 모거리니, 밖거리니, 안거리니 하는 건물 이름만 적어 놓고, 적거지의 형성 배경이나 추사 선생의 삶을 온전하게 설명하는 안내자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추사관 입구에 마을 토박이인듯한 노인어른만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관광객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계셨다.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관광을 하려는 나그네로 길을 나섰다면, 어쨌든 관광지에 대한 몇가지 공부를 하여 두고 찾는 게 바른 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정희 선생의 유배 생활을 알기 위해 제주대학교 도서관을 며칠간 뒤적였었다. 그 결과 그가 유배 기간 동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글들과 한시, <추사집> 따위를 살필 수 있었고, 그에 대한 비평이나 논문, 거기다 오성찬 선생의 소설 <추사 김정희>를 가까스로 대할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년)에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추사가 생존했던 시기는 안동 김씨와 경주 김씨, 그리고 풍양 조씨 등 왕의 처가가 세도를 잡고 뒤흔들던 때로, 헌종 6년(1840)년 10월 1일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55세의 나이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간을 대정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사림파의 집권에서부터 서인과 동인, 다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지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족벌정치가 판을 치는 척족세도(戚族勢道)의 시대까지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를 읽어나가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추사가 훈척 가문 사람이면서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였고 일찌감치 중국 연경(燕京)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 고증학의 비조로 빛을 발했던 인물임을 세세히 나열하는 것 또한 그리 쉽지 않다. 내가 먼저 살피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를 읽어나가는 작업은 복잡한 조선후기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제주섬으로 험난한 바다를 거쳐 유배 오는 장면에서부터이다.

 

지금은 카훼리호를 타면 완도에서 3시간, 목포에서 5시간 가량 걸려 제주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또한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너무 높으면 배가 뜨지 않는다. 대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완도항에서 제주를 향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폭풍우가 심해 여관방에서 하루 더 머무르며 바람 잘 날만을 기다려야 했던 기억이 있다. 하늘과 바람이 바다를 다소곳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는 험한 길이 제주로 향하는 뱃길이다. 그런데 추사가 유배를 오던 그 시절의 뱃길이야 오죽했을 것인가. 당시 추사가 제주를 향하던 뱃길 모습을 문인 민규호(門人 閔奎鎬;1836-1878)는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제주도는 옛날의 탐라국으로 바다가 그 사이에 있는데, 매우 크고 또한 바람이 많아서 사람들이 건너가려면 항상 열흘이나 한 달을 잡았다. 공(公)이 막 건너가는데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나는 중에 천둥과 번개가 곁들여 죽살이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어 부등켜 안고 부르짖으며 도사공 역시 다리를 절며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공은 꼿꼿이 뱃머리에 앉아서 시를 지어 높게 읊으니 그 소리는 바람과 파도에 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곧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길, ‘도사공아, 힘껏 키를 잡고 저쪽으로 가라’고 하니 배는 이에 빠르게 달려서 아침에 떠났는데 저녁에 제주도에 닿았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크게 놀라서 날아 건너 왔다고 하였었다.

 

열흘이나 한 달을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며 향해야 하는 뱃길이었다. 그런데 추사의 유배 뱃길은 1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바람과 파도, 천둥과 번개가 뱃머리에 앉은 추사의 시를 듣고 잦아들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적어 넣고 있다. 그리고 유배 뱃길이 와 닿은 제주섬의 포구는 화북진이었다. 그때 추사는 다음과 같은 7언절구 한시를 지어 남겼다. 

 

마을 안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는

귀양살이 신하의 얼굴 가증도 하지

마침내 죽을 고비 넘어서 다다른 곳

남극에 미친 은혜, 파도도 잔잔해

 

그는 결구에서 ‘남극에 미친 은혜(南極恩光)’라 하여 제주에 죽지 않고 도착한 것을 임금의 은혜로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직면해서도 주자 성리학적 이념을 정신의 푯대로 세운 그에게는 모든 일들이 임금의 은혜로 여겨졌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추사는 화북진에 도착한 후 걸음을 옮겨 대정현의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추사가 둘째 아우 명희(命喜)에게 보낸 편지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 풍경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읍 아래의 조금 좋은 곳에 있으며 자못 정갈하고 윤택’하며, ‘온돌방은 한 간인데 남향으로 눈썹 같은 툇마루가 있고, 동쪽에 작은 부엌, 작은 부엌 북쪽에 두 간쯤 되는 부엌’, 그리고 ‘울타리 두른 것은 집 형태를 좇았는데 섬돌 사이에 밥을 날라올 수 있는 곳을 터 놓았다’고 했다.

 

그의 적거지에는 보통의 관례대로 야산에서 베어온 가시나무와 탱자나무, 실거리나무, 구지뽕나무, 찔레넝쿨 따위로 울타리가 조성되고, 외부인과의 차단된 섬 안의 섬속에 갇혔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추사는 송계순의 집에서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적거지는 그 집을 복원한 것이다.  

 

섬 안의 섬, 추사의 적거지는 가로 놓인 정낭으로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정낭을 넘어서서 오른편에는 연자마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소를 이용한 연자마가 아니라, 갈 헝겊으로 눈을 가리운 조랑말이 연자마의 웃돌을 돌리는 ‘말방에’라는 것이다. 유배지에서 말을 몰며 말방에를 찧는 제주섬 사람들이 ‘어려려려‧‧‧’ 하고 구성진 노랫가락을 망연자실 듣고 있는 추사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연자마가 있는 집 맞은편에는 밖거리가 놓여 있고, 그 맞은편에 안거리, 이문거리, 모거리가 놓여 있다. 새마을 운동을 한참 진행하기 전만 하더라도 제주섬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초가집이 고고한 향취를 풍기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을 함께 구경하던 관광객들은 집 뒷편의 ‘굴묵’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온돌방을 데우기 위해 뚫린 아궁이에다 불을 땐다는 설명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대하는 굴묵의 아궁이는 사라져버린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파랗게 돋아난 고사리를 품고 있었다.           

 

나는 자갈로 뒤덮인 마당을 느릿느릿 걸으며 ‘눈썹 같은’ 난간에서 마루로, 그리고 어둠 속에 파묻힌 방안으로 눈길을 옮겼다. 마당을 자갈로 덮어 넣은 것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 그렇게 한 모양인데, 어렸을 적 대부분의 집 마당의 기억으로는 거기에 보릿짚이나 띠풀이 깔려 있어야 했다. 그래야 안채에서 급작스레 뒷간으로 달려가시던 할아버지가 마당의 지푸라기를 집어 밑을 닦을 걸 장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안에 비쳐든 햇살은 추사가 살던 때에도 책상 머리맡에 앉은 그의 외로운 눈빛을 은근하게 밝히고 있었으리란 생각을 했다. 추사가 섬 안의 섬 속에서 논어나 맹자를 읽다 기침을 몇 차례 하고는 장동 본가가 안동 김씨에게 압류되어 고향인 예산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을 처자식을 떠올렸으리라.

 

그의 편지글들은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걱정, 해소증, 피부질환과 실랑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준다. 귀족 출신으로 의식주에 별 어려움 없이 살던 그가 거친 조팝과 푸성귀로 연명하면서 바람 많은 유배지의 기후를 견뎌내어야 했으니 그렇게 질병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으리라. 김치가 없으니 부쳐달라는 편지, 계피‧백합‧귤껍질 따위의 약재를 일일이 적어서 구하여 달라는 편지가 여러 통인데, 50대 후반에 급작스레 겪게 된 생활의 변화와 집안의 궁핍함, 정치적 좌절감 등은 그로 하여금 몸마저 병들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배 기간 동안 차례로 부인과 형제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의 가슴은 슬픔을 넘어선 한서림으로 얼마나 들끓었을 것인가. <부인 예안이씨 애서문(婦人禮安李氏哀逝文)>을 보자.

 

임인년 11월 을사 삭 13일 정사(丁巳)에 부인이 예산의 묘막에서 임종했으나 다음 달 을해(乙亥) 삭 15일 기축(己丑) 저녁에야 비로소 부고가 바다 건너로 전해져서 남편 김정희는 상복을 갖추어 입고 슬피 통곡한다. 살아서 헤어지고, 죽음으로 또 한 번 갈라진 것을 슬퍼하며 영원히 간 길을 좇을 수 없음이 뼈에 사무쳐서 몇 줄 글을 엮어 집으로 보낸다. 글이 닿는 날 그 궤전(饋奠)에 인연해서 영궤 앞에 고할 것이다. 거기 다음과 같이 고하기를 바란다.

 

아아, 나는 착고가 앞에 있고 산과 바다가 뒤를 따랐으나 아직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한낱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져서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이 어쩐 까닭인가. 아아, 대체로 사람마다 모두 죽음이 있거늘 홀로 부인만 안 죽을 수 있으리오만, 죽을 수 없는데 죽은 까닭으로 지극한 슬픔을 품게 되고 기막힌 원한 또한 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품어내면 무지개가 될 것이고, 맺히면 우박이라도 되어 가히 공부자(孔夫子)의 마음이라도 움직이겠기에 착고보다도 더 심하고 바다보다도 더 심함이 있는가 보다.

 

아아, 삼십 년 동안 효를 하고 덕을 쌓아서 친척들이 칭찬하였고, 친구와 관계 없는 남들에 이르기까지도 감격하여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람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 해서 부인은 받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그대로 잊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일찍이 장난으로 말하기를 부인이 만약 죽으려면 내가 먼저 죽는 게 낫다 하여 부인은 크게 놀라서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가 바쁘게 귀를 막고 멀리 달아나며 듣지 않으려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세속의 부녀자들이 크게 싫어하는 것이나 내 말은 끝까지 장난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구나. 먼저 죽은 것이 무엇이 시원하겠는가. 내 두 눈으로 홀아비가 되어 홀로 사는 것을 보게 할 뿐이니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한스러움만 끝없이 사무치는구나.

 

바다를 건너 온 부인의 부고를 받고서, 상복을 갖추어 입고 통곡하는 추사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져 온다. 요즘처럼 ‘욕망’이라는 이름 아래 TV 멜로드라마의 내용에 너도 나도 한마디씩 거들어야하는 현실. 자본의 손아귀에서 모든 것은 상품‧기호로 해석되어 가장 존귀로워야 할 부부의 책임감있는 애정마저 내몰고, ‘욕망의 이데올로기’가 최선두에 서서 흐느적대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추사와 부인 사이에 결어졌던 사랑의 튼실함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후들후들 떨리는 붓을 잡고 편지를 쓰던 추사가 스러져가는 노을 빛을 바라보던 눈빛은 얼마나 붉게 얼룩졌을까.

 

그런 9년간의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한치의 틈도 없는 고독과 자연에의 몰입, 예술혼을 불태우게 했다. <세한도>와 ‘추사체’가 유배지인 제주에서 탄생한 것은 그런 고독감과 진한 슬픔, 그런 감정으로 들여다본 제주의 자연이 있었던 까닭이 아닐까. 추사의 서화가 전시되어 있는 추사관으로 들어서며 나는 그의 한시 중에서 그가 고즈넉이 바라보았을 수선화를 떠올렸다.

 

소복한 꽃대는 송이마다 동그란데

그 맵씨 깨끗하고 그윽하구나

매화는 고매하나 섬돌을 못 떠나고

맑은 물에 보아하니 바로 신선이구나

 

푸른 바다, 푸른 하늘 시름 가시고

너와의 선연(仙緣)은 다할 수 없어

호미 끝에 버려진 예사론 너를

오롯한 창가에 놓고 기른다

 

사철 꽃으로 뒤덮인 제주.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들판에 무더기무더기 자라나는 수선화를 예사롭게 보아넘겨버렸다. 그 푸른 잎사귀에 말게 피어, 그 소박함이 찬란하게만 여겨지는 수선화. 시름겨운 유배인의 가슴을 푸르게 씻어주는 수선화를 추사는 그토록 사랑하여 창가에 놓고 길렀다 했다. 자연에의 몰입을 통해 자연에 동화됨으로서 유배 생활의 불안감을 씻어내었던 추사의 모습을 이 시를 통해 읽어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수선화를 사랑했기에 <세한도>라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고, 빼어난 인격을 한껏 실은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추사관에 들어서면 사본으로 <세한도>가 걸려있는데, 그 속에는 밑둥에 부실한 노송 두 그루, 오른편에 두 그루의 젊은 잣나무, 노송 아래에 낮은 한 채의 와가, 그리고 그 와가 속에 한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전예체로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고 머리에 쓰여져 있다. <세한도>는 <<논어>> 중에서 ‘겨울 당한 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여느 나무와 다르다는 것을 알거니와(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대목에 착안하여 창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세한도>는 그림 속에 보이는 추사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李尙迪)이 연경에 다녀와서 보내온 가장령(賀長齡)의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받고,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세한도>의 제문(題文)을 보면 ‘전한(前漢)과 같이 순후한 풍속에도 당시의 급암 정당시와 같은 사람은 현달한 현자였으나, 그의 성시(盛時)에는 많이 모이던 빈객들도 그의 세력이 쇠하자 하루 아침에 문전이 쓸쓸하였’는데, 자신이 유배객이 되어 세력에서 멀어졌음에도 천만 리 머나먼 곳에서 구하여 보내 줌에 칭찬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세상 사람들은 도도하게 오직 권세와 이익에만 쫓아가는데, 이처럼 마음과 힘을 합하여 권세와 이익이 있는 자에게 보내지 않고, 도리어 절해고도 유배지에 있는 초췌하고 마른 나에게 보내주니, 세간의 권세와 이익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태사공(사마천)의 말대로 “권세와 이익으로 얽힌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고 했다. ‧‧‧ 추운 겨울 이전에도 한 송백이요, 추운 겨울 이후에도 한 송백이어늘 성인이 특히 추운 겨울 이후의 송백을 칭찬하였다. 이제 그대와 나의 관계는 귀양 전이나 후가 더하고 덜함이 없도다. ‧‧‧    

 

권세와 이익을 좇지 않고 송백처럼 변치 않는 사제 간의 정을 형상화한 세한도. 언제나 자신의 이로움만을 좇아 절개를 저버리고 사는 세상 사람들을 날카롭게 꼬집고, 유배라는 추운 겨울이 자신을 휘감싸고 돌지만 시들지 않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추사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그와 같은 정신이 기법보다는 마음의 뜻을 존중하는 간결하고 담담한 문인화의 새 경지를 마련하게 했던 것이다.

 

추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37점의 서예탁본이다. 추사는 당시 연경학계에서 금석, 서도의 제일인자로 꼽히던 옹방강의 서체로부터 역대의 금석 탁본과 각종 법첩(法帖)을 수집하고 연구함으로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졸박(拙樸)하고 청수(淸瘦)한 서체. 그것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서화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그리고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학문의 결과에 의해 얻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서양 열강의 침략과 함께 서양화의 기법에만 치중하게 되고, 뜻을 중히 여기는 추사의 예술적 경지를 그대로 이어받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어져 온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추사관에 전시된 서예탁본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나는 유배지에서 피어나던 추사의 고독과 창가의 수선화에게 구수하게 던지던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추사관을 나오며 적거지 곁에 빨갛게 익은 감나무를 슬쩍 쳐다보았다. 재래종인듯 작은 알들이 알알이 달려 있었다. 그때에도 그 감나무가 열려 추사의 뒷모습을 은근히 지켜보고나 있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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