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이강(조정석 분)이 송자인(한예리 분)과 함께 전봉준(최무성 분)의 유골을 들판에 뿌렸다. 예전에 파란 보리밭 사이에 피어난 녹두꽃을 보며 전봉준이 했던 이야기가 들려왔다. “녹두 씨앗을 뿌렸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그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이 동네에서 저 산골로 저 골짜기에서 이 개울가로 그렇게 피고 피어서 천하가 온통 녹두꽃으로 흐드러진 그런 날에 한줌의 거름으로 죽고자 했었다.” 백이강은 편히 쉬면서 지켜봐달라고 독백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은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수 많은 시청자들을 울리면서 현재와 맞닿아 있는 동학농민혁명과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매 회마다 전개되는 등장인물들의 빼어난 대사들은 심금을 울리며 잔잔히 가라앉았다. 온갖 상찬이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스토리와 연출력이 기존의 역사 드라마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루카치(György Lukács)는 『소설의 이론』에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며, 별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가득한 근대를 얘기하는 장르로 장편소설을 말한 바 있다. 드라마 「녹두꽃」은 온갖 억압과 고통이 팽배해 있던 전근대가 끝장나고 새까만 어둠이 도사린 근대의 복잡다단한 모습의 기원을 용의주도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다.
우선, 영웅서사시의 변형이 될 수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그리기가 아니었다. 근대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백이강’이나 저항의 최선두에 서서 쓰러져간 수많은 동학도, 의병 등을 중심에 세우고, 그 반대 지점에 개화를 내세우다 일제 부역의 패착을 범하는 개화 인텔리인 ‘백이현’을 세웠다. 그리고 보부상 ‘송자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대의 상업 활동뿐만 아니라 주인공과의 러브라인을 애틋하게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감성을 달달하게 자극했다.
근대적 인간 그리기의 방식은 ‘이름 갖기’ 모티프가 이용된다. ‘백이강’은 전라도 고부 관아의 이방인 ‘백만득’이 노비인 ‘유월이’를 범하여 태어난 얼자로 백가의 명령에 따라 온갖 패악질을 도맡아 하던 ‘거시기’로 불리던 인물이다. 특정한 이름 없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행동대장 노릇을 하다가 손이 찍히는 사건을 통해 세상을 열기 위해 봉기한 동학농민군 별동대장인 ‘백이강’으로 거듭난다. 동생 이현이 꽃길만 걸을 수 있도록 자신은 욕받이로 살겠노라 다짐했던 인물이 전봉준과 동학도들을 만나 활동하면서 ‘인즉천(人卽天)’을 깨달아 ‘인간’이 된다.
황진사가 백이강에게 봉기를 해 봤으니까 알 것이라면서 “정말로 사람이 하늘이더냐? 그건 허상이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사람도 위아래가 있고 귀함이 있으면 천함이 있고, 우월함 열등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땅 없이 하늘만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느냐면서 “하늘만큼 땅도 겁나게 귀한 것입니다. 긍게 위엣 놈만큼 아랫놈도 귀한 거 아녀? 귀한 놈만큼 천한 놈도 귀하고, 잘난 놈만큼 못난 놈도 귀하고, 그렇게 사람 모두 귀한 겨. 귀해서 하늘인 겨.”라고 한다. ‘인즉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동학의 인즉천 사상은 불교의 ‘중생즉불(衆生卽佛)’이라는 화엄적 논리와 매우 깊은 관련성을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는 ‘백이현’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이 조선이 문명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양반 사대부가 만들어놓은 조선을 거부하고, 인텔리들이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교화하며 개화의 길로 끌고 가려고 한다. 전봉준이 백성의 고혈로 얻은 지식을 백성을 위해 써보라고 하자 그는 “송구한 말씀이지만 소생은 나리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죽창은 야만이니까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승인 황진사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현이 결혼하는 것을 신분상의 차이를 통해 거부하고, 자신을 사지로 몰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도채비(도깨비)’로 변신한다. 나중에 친일에 앞장서서는 일본말로 도깨비를 뜻하는 ‘오니(鬼)’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양반들에 대한 미움, 신분제에 대한 분노, 무지와 패악질을 일삼는 아버지 등에 대한 거부감은 동학농민들에게 총을 쏘고, 양반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총질을 일삼는 ‘도채비, 오니’가 되어버린다.
전봉준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면서,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을 잠시 멈추게 하여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말을 걸며 무엇이 중한가를 끊임없이 물어댄다. 동학농민운동, 갑오·을미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 등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정치적 의의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정확히 평가된다.
백이현이 ‘문명’이 사람을 교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말에 그는 “내가 생각하는 야만 중에 가장 참담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라고 되묻고 소위 ‘문명국이라 자처하는 열강들’이란 “약소국에 쳐들어가 등골을 빼먹고, 또 다른 약소국을 놓고 물고 저들끼리 물고 뜯는 짐승들이지. 문명을 만든 것도 사람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도 사람이네.”라면서 일본이나 청나라 등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경계와 백이현의 사고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이네.”라고도 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게. 가보지 않았을 뿐 갈 수 없는 것이 아니야.”라는 등 전봉준의 대사는 정제되어 있는 어록으로 남을 만하다.
3. 그리고 「녹두꽃」은 농민뿐만 아니라 보부상, 잔반(殘班) 등 수많은 인물군상도 보여주는데, 초반부터 별동대 대원으로 등장하여 백이강의 곁을 지키는 ‘해승’이라는 승려가 낯설다. 한편 당시 불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동학농민혁명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궁금해진다. ‘해승’은 우락부락한 외모에 말수가 적으면서 사려가 깊으며, 택견의 달인이다. 홈페이지의 캐릭터 해설에는 “조례(상여꾼)의 아들로 태어난 울분을 싸움질로 풀며 자랐다. 왈짜로 살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거란 부친의 유언을 따라 출가했다.”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승려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과 깊은 관련을 맺는 인물로 ‘서장옥’이라고 있었다. 서장옥은 서포(호서남접) 곧 충청남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인데, 이전에 30년간 수행을 하다가 동학에 투신했다고 한다. 오지영은 그의 “신체는 비록 작았지만 용모가 특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지심(敬畏之心)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승(道僧), 이인(異人), 진인(眞人), 궁적(窮賊)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하였다”(『동학사』, 영창서관, 1940.)라고 했다. 그리고 전봉준과 김개남 등을 제자로 두고 충청 호남일대의 남접을 편성 지도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을 비롯해 많은 승려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녹두꽃」이 이러한 불교계 인물들을 다 아우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동학도들이 모여 있다가 안핵사 이용태가 이끄는 관군이 와서 탄압하는 곳으로 선운사가 그려졌다. 선운사라고 하면 동학과 관련하여 거대한 석불의 복장에서 비결을 꺼내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있고, 그것이 나오게 되면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다.
손화중 접중에서 ‘벼락살[霹靂殺]’을 피하여 비결을 꺼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주모자 3인이 강도 및 역적죄로 사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100여 명은 엄장(嚴杖) 맞았다고 했다.(『동학사』) 이 부분이 드라마에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비결 사건은 혁명 일 년 반 전의 사건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솔산 선운사가 미륵의 성지로 도탄에 빠진 중생들 곁으로 미륵이 하생하리라는 믿음과 결부되어 동학도들이나 민중이 숨어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즈음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열강들의 제 잇속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갈등, 계급 간 모순이 적지 않다. 「녹두꽃」이 그려낸 19세기 말의 모습은 아직도 녹두장군이나 동학농민군 등이 꿈꿨던 ‘인간 세상’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다시금 환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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