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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국가는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희생과 피를 흘린 끝에 비로소 정착되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도 말하는데, 건국 75년 이 지난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에 따르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졸렬한 행동으로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
최근 한반도 한 모퉁이에서 당 대표 선출 10년 전의 비리에 기소는커녕 경찰도 7개월 이상 증거불충분과 공소시효 문제로 고민하는 사안에 당 윤리위에서 불쑥 자격정지 6개월을 징계한 행위도 사실 여당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일이다. 그런데, ‘내부총질을 한 당 대표가.....’로 촉발된 자중지란도 당사자가 즉각 해명하거나 사과로 수습되었을 일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문자 주고받는 것을 들킨 당사자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새 원내총무를 뽑아서 잔여기간 동안 대표 권한 대행 체제를 유지하면 되었을 일을 굳이 비대위원들이 자진사퇴하는 꼼수로 비상 상태를 만들어 당 대표를 몰아낸 것은 속셈이 보이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축출된 당 대표의 반격으로 모양새가 우습게 됐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이의신청이니, 항고니 하면서 정치를 법정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발상도 쩨쩨하기만 하다.
문득 10· 26· 사태가 벌어지기 석 달 전, 당시 유신 정부는 눈엣가시 같은 야당 총재 김영삼을 몰아내려고 원외 지구당 위원장 세 명을 충동질하여 그해 5월에 있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 삼아 총재직무 정지가 처분을 신청하게 했다. 당시는 유신 정부의 야당탄압이었지만, 이번은 여당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자충수였다. 더더구나 지금 여당은 물론 제1, 2야당조차 모두 비대위 체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도 슬프게 한다.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역사를 조작하는 일본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제국이라고 하는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제국은 BC 8세기 로물루스 형제가 세웠다고 하는데, 6세기경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웠으나 내전과 전쟁을 거치면서 공화정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등과 3두 정치를 폈다가 이내 폼페이우스를 몰아내고 독재하다가 공화파의 사주를 받은 브루투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양자이자 후계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투스와 2차 3두 정치를 시작했지만, 그 역시 안토니우스 멀어지고 악티움해전에서 승리하여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정복했다. 결국 BC 27년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프린켑스(Pinceps), 즉 ‘로마 제1 시민’ 칭호를 수여하여 사실상 로마 초대 황제가 됐다.
그런데, 권력을 잡기 위하여 손을 잡았다가 적으로 갈라서기를 반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이미지 쇄신과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역사 창조를 작정했다. 그는 유명한 작가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에게 트로이 전쟁에서 주인공을 찾아서 로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령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베르길리우스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와 싸웠던 트로이의 장수 중 아이네아스 (Aineias)를 찾아내어 그를 로마인의 조상으로 하는 전설을 만들었다.
아프로디테 여신과 인간 안키세스(Anchises)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패망 후 그리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가족과 유민들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로마 근처의 라티움 해안에 도착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라티움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라티누스에게 라비니아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라티누스는 이국에서 온 이방인과 혼인하는 딸의 자손이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있다가 아이네이아스가 찾아오자,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런데, 당시 라비니아에게 청혼한 상태인 투르누스 왕은 이방인이 라비니아와 혼인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라티움을 공격하니, 아이네이아스가 이를 물리친 뒤 라비니아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고대도시 라비니움(Lavinium)을 세웠고, 그의 후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BC 753년 로마를 건국하여 아이네이아스는 로마 건국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도 로마 건국 신화 “아이네이아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면서 황당한 소설을 파기하라고 유언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대로 출판하도록 했다. 그것은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에서 니소스와 크레타섬을 거쳐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돌아서 마침내 이탈리아의 티베르강까지 도착하는 멀고 험난한 여정에서 인내력, 자제력, 굳건한 모험심과 신에 대한 복종심을 보여주어 로마 건설의 소재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별명인 이울루스(Iulus)가 율리우스(Julius) 가문의 선조라고 하여 카이사르는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또 카이사르의 외조카이자 양자인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아이네이아스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우리 역사는 어떻게 기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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