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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의 문화비평] 근현대 역사화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이명복 화가

피앤피뉴스 / 기사승인 : 2023-11-23 11: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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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역사화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이명복 화가

오대혁(시인, 문화비평가)

 

<작품 앞에 선 이명복 화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를 혼자서 찾았다. 제주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일러주는 이가 있었다. 공모 선정 이명복 작가의 ‘동행(同行)’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이었다.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2개의 방은 제주 곶자왈과 해녀와 밭일하는 여인들을 섬세한 아크릴화로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다음 방은 한국 현대사와 제주 4.3을 표현한 거대한 그림들로 채워져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작품의 스케일도 대단했지만 최근 보았던 제주 표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다양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터뷰 요청을 하니 어디선가 니트로 짠 겨울모자를 쓰고, 허연 턱수염이 살짝 나고, 부리부리한 눈에 맑은 안경을 쓴 이명복 화가가 나타났다. 자연과 역사, 소박한 이웃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다.

제주와 동행하게 된 사연

“2010년 제주에 입도하고 14년이 지났네요. 내려갈 당시에는 제주 4.3과 같은 사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여행하면서 제주도가 아름다웠다는 기억 하나로 아내와 함께 무작정 제주를 간 것이었죠. 그런데 막상 가 보니까 제가 계획했던 순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고요. 90년대부터 대부분의 작품이 풍경화였기 때문에 아주 자신만만하게 ‘제주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왜 그렇게 그리고 있어?’ 제 스타일로 한번 보여주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죠. 민중미술 이런 걸 덜어내고 노후를 편안하게 살기 위해 제주 풍경만 생각했죠. 근데 제주도에 살려면 제주도 분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 살고 계신 그분들을 모르고서는 그림이 안 되는 거구나. 거기에 동의하고 몇 년 고민했죠. 금방 가면 잘될 것 같았는데 안 되니까 주변에서 권유를 많이 했어요. 거기 문화 쪽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그냥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얘기한 건 아니고, 저를 일부러 그런 ‘잃어버린 마을’ 이런 데를 데려간 거예요. 그때만 해도 왜 이렇게 이상한 데를 데려가나 했어요. 공부도 하고 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고, 그래서 2014년부터 이제 몇 점씩 그려냈어요.”

그는 2010년 제주에 내려갈 때만 해도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와 제주도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품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곤을동을 찾고 제주 역사를 공부하면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주 4.3을 30년째 담아낸 ‘탐라미술인협회(탐미협)’ 회원이 되려 했지만 한동안 허락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제주에 탐라미술인협회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이천 년대 중반에 서울 민족미술협의회 대표였고, 강요배(제주 4.3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창작했는데, 1980년대 탐라미술인협회 대표를 맡고, 제주 4.3의 역사를 다룬 연작을 발표하였다. 1992년 ‘제주민중항쟁사’라는 개인전을 열고, 1998년에는 화집 『동백꽃 지다』을 출간했다. 2022년 8~9월 ‘강요배, 첫눈에’라는 제목으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형이 전국 민미협 대표를 하셨죠. 그런 인연으로 탐미협에 들어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어요. 강정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 들어갈 수 있냐고 하니 안 된다는 거예요. 제주도에 내려왔다고 덥석 받아 주는 게 안 됐던 거지요. 제가 자세가 안 됐던 거 같아요. 2014년에 정방폭포를 담은 그림을 그렸는데, 박경훈 제주 4.3 미술을 대표하는 판화가이다. 최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박경훈씨(4.3 기억 투쟁-새김과 그림’ 전시회(2023. 3. 30. ~ 2023. 7. 2.)가 있었다.)가 전화 와서 들어오려면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탐라미술인협회는 4.3을 어떻게 미술로 풀어내야 하는지를 30년 동안 고민한 단체예요. 그런 데를 갑자기 제가 뛰어들어 분위기, 감도 못 잡고, 어떻게 그려야 될지 방향 설정이 안 되어 있었어요. 그러다 슬슬 생각이 내가 공부한 만큼만 그림으로 풀어내는 게 좋겠다 그래서 이제 그리기 시작했어요. 2014년 이후 탐미협 기획 전시하면 거기에도 붙여주죠. 전시가 있다고 얘기하기 전에 1년에 한 점씩은 그려요. 약간 기록적인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조금씩 쌓이고 거기서 저만의 어떤 스타일 방법을 찾아간 거죠. 물론 이제 이게 앞으로 지속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잘 왔다고 생각해요.”

탐미협은 제주 4.3을 드러내기 위해 30년 동안 활동한 제주 미술인 단체다. 제30회 4.3미술제(2023. 3. 7. ~ 2023. 5. 21. 제주현대미술관 본관)에서 탐미협은 “지난 30년 동안 4.3 미술과 작가는 함께 성장했다. 애초에 4.3을 알리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출발한 탐미협 작가들은 기억, 투쟁, 저항, 해원, 상생, 공동체 등의 키워드로 4.3을 굳건히 지켜낸 파수병이었다. 그들이 곧 4.3 미술이며 4.3 미술의 역사”(「제주현대미술관에서 마주하는 4.3미술제 30년 역사」(『제주의 소리』, 2023.03.06.))라고 이야기하였다. 초창기 4.3의 역사적 사건의 재현에 집중했던 4.3 미술은 이제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서 나아가 평화와 상생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아내며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필자가 보건대 화가 이명복은 그런 탐미협에 가입한 후 제주를 그려내는 대표적 화가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전시 제목이 동행이에요. 제주도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만 보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자연과 같이 살고 사람들과도 함께 살고 지금도 정치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분들이 갖고 있는, 아니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 그것을 약간 이렇게 드러내는 게 또 예술가 화가가 지녀야 할 사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주의 자연과 농민을 전시한 곳에서 이곳 역사를 다룬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선 깜짝 놀라는 분들이 많아요.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거죠. 저지리에 살고 있어서 집 근처의 곶자왈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그는 ‘동행’이라는 전시회 제목이 갖는 의미를 말했다. 제주에 살면서 함께 가야 할 세계, 그것은 제주의 자연이고 농민이며, 해녀이고, 제주의 상처받은 역사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온전히 제주를 받아안기 위한, 아름다운 작업이 10여 년 이어졌다. 물론 그 작업은 이전의 작업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학과를 졸업(1982)한 그는 1980년대 「그날 이후」와 같은 작품으로 미군 병사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기도 하고, 1990년대 「노동자 최씨」와 같은 작품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해내는 면모를 보였다. 비평가 이경모는 “등짐 가득한 삶의 무게를 극복해 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통하여 동시대 한국사회의 지층을 파헤친 것”(이경모, 「자연과 역사에 대한 서사 혹은 풍경」, 『전시회 ‘동행(go with)’ 화집』, 2023. 10.)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온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는 그의 창작 세계가 제주와 만나면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다.

제주다움: 곶자왈과 해녀와 농부

처음에 그는 제주에서 곶자왈과 해녀와 농사짓는 분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의 작업실 근처에 있는 곶자왈이 제주에서의 첫 작업이었다고 했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과 ‘가시덤불’이나 ‘잔 나무와 가시덤불이 있는 숲’을 뜻하는 말인 ‘자왈’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다. 최근 사전(『개정증보 제주어사전』(제주특별자치도, 2009))에는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설명된다.(‘곶자왈’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공식 기록은 『제주어사전』(제주특별자치도, 1995)이다.(최수정·현화자(2018), 「곶자왈 용어 정의를 위한 고찰」, 『문학과 환경』 17권 1호, 문학과환경학회, p. 89.)) 그가 사는 저지리 근처 곶자왈에는 비가 오면 물을 머금는 화산암 때문에 숲길이 촉촉하고 울창한 숲, 푸른 이끼 등으로 뒤엉켜 살아 꿈틀대는 곳이다. 화가는 서늘한 초록으로 빛을 내는 곶자왈을 「4월의 숲」, 「곶자왈」과 같은 작품으로 묘사하고 있다. 푸른 색조 중심의 곶자왈 묘사는 원시성을 갖하게 드러내면서 제주 자연의 신성함까지 자아낸다. 또한 일출과 일몰 또는 풍랑이 일 듯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바다를 드러낸 「엄마의 바다」와 「절정」 같은 작품들 또한 제주의 신성(神性)을 자아내고 있는 듯하다.

「곶자왈」(152×208cm 장지에 아크릴, 2022.)

 

「엄마의 바다」(127×194cm 장지에 아크릴, 2023.)


 

한편 그는 농사짓는 분들을 그렸다. 봄볕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 모자에 수건 얹고 골갱이로 밭에 무슨 씨앗인가를 심는 모습의 ‘할망’을 그린 「봄」, 겨울 배추밭에 앉아 따스한 겨울 햇살을 한껏 머금은 ‘아주망’을 그린 「겨울 배추밭」과 같은 작품들은 ‘요망진’(야무진) 제주 여성을 형상화하면서 제주도의 보물이 사람임을 또한 보여준다.


해녀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 또한 정겹고 아름답다. 가족의 생존을 마련하는 터전인 바다가 잘못하다간 단숨에 저승길로 달려갈 수도 있는 해녀들의 삶. 「해녀 노래」 속 “한 길 두 길 들어가난 / 저싕질(저승길)이 왓닥가닥(왔다갔다)” 한다는 노래처럼 그 고된 삶을 이어온 제주 해녀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표현해냈다. 

 

「봄」(92×62cm, 장지에 아크릴, 2021.)

 

「귀로」(45.5×33.4cm, 장지에 아크릴, 2022.)

 


장지에 아크릴로 그린 제주의 여인들은 다채로운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달콤한 맛이 담긴 듯한 흙, 장미꽃무늬들이 잘 어우러진 일바지, 푸른빛의 손도매(토시)의 하늘빛 장갑, 하얀 수건을 쓰고 굽은 등허리에 삶의 무게가 보인다. 테왁과 오리발, 소라와 전복, 보말 따위를 가득 담은 망시리를 지고 가는 해녀의 뒷모습은 보랏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걸음걸이가 무거울 듯싶지만 그 아름다운 빛깔로 인해 환하고 경쾌하다. 제주의 할망, 어멍을 바라보는 이명복 화가의 시선은 어디에 견주기 어려운 빛깔을 보여준다.


이야기와 치유, 그리고 진실의 서사

“시작은 저렇게 안 했어요. 해녀와 농사짓는 분들 얼굴을 크게 그렸어요. 여성 노인들은 말씀은 안 하시지만 4.3을 다 겪으신 분들이죠. 가슴 속에 다 응어리가 들어 있지만 얘기를 못하셨던 분들이죠. 그분들 초상을 그리고 하다가 그분이 살아온 얘기를 짧게나마 쭉 듣고 그러다가 이야기를 가장 극적으로 할 수 있는 표정을 찾아내죠. 2019년도에 이분(김평국)을 인터뷰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준비만 하다가 2021년도에 이제 옮겨놓은 거죠.”

서울 외곽의 아파트에서 구순을 넘긴 김 모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18살에 겪었던 4.3의 기억을 70년 동안 꼭꼭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할머니는 죽기 전에 풀어놓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한병철(2023),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p. 114.) 이야기가 갖는 치유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명복 화가의 인물화에서는 멈춘 화면 속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나온다.  

 

「무죄-김평국」(249×183cm. 장지에 아크릴, 2022.)

 

「춘자 삼촌」(208×152cm. 한지에 아크릴, 2022.)



「무죄-김평국」은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가 겪은 이야기를 거대한 화면으로 들려주고, 「춘자 삼촌」은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듯한 해녀 ‘춘자 삼촌’의 삶을 주름 하나하나에 담아낸다. “이야기하는 중에 계속 말씀하시면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손으로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요. 그렇게 찍은 수많은 사진 컷 중에서 이분을 대표할 수 있는 표정, 그것 하나를 이제 옮기는 거죠.”라고 화가는 제작 방법을 말한다. 두 작품 모두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르다. 인물은 입을 다물지 않고 살짝 벌린 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나 아렌트(Annah Arendt)는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한나 아렌트(1958), 『인간의 조건』에서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1885~1962)’의 문장을 인용하며 한 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구술자의 소리와 운율이 있고, 표정과 억양을 통해 전달됨으로써 상처 입은 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림은 한순간의 정지 화면을 통해 그런 이야기 전달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명복 화가의 그림은 4.3의 끔찍한 기억이나 물질하며 살아낸 제주 해녀의 애환, 제주 곶자왈의 생명성 등이 정밀하고 치밀하게 묘사되고, 질곡의 근대사가 전지적 시점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 경이로운 서사를 완성한다.


작품 속의 김평국 할머니(1930년생)는 소리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949년 경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해안가로 대피했다가 먹을 걸 구하려 아라동 집에 갔다가 경찰들한테 붙잡혔다. 100여 명이 포승줄에 묶여 군인들과 마주했는데, ‘고등군법 제77조 내란죄’라고 했다. “형무소에 끌려갈 때까지 재판도 없고 왜 옥살이하는지도 몰랐어. 옥중에 징역 1년이라는 얘기를 들었지.”(「제주4.3 수형인' 김평국 할머니 "경찰이 개 잡듯 때렸다"」(『제주의 소리』, 2018.03.19.)) 

70년이 지난 재심 재판에서 재판장은 판결했다. “김평국 무죄!” 할머니는 말한다. “기분 좋다. 빨간 줄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없어지고 가정으로 들어가서도 자손들이 볼 때 몇 대 할머니는 옥살이 흔적이 남았다 하는 것이 없어지게 돼서 그것이 가장 후련하고 기쁘다.”(「70년만의 '무죄', 4.3수형인들 눈시울 붉혀」(『제주도민일보』 , 2019.01.17.)) 이야기될 수 없었던, 70년 동안 숨죽여 있던 역사가 그림을 뚫고 나와 이야기된다. 인물화는 무죄 선고를 통해 70년 트라우마를 극복한 승리자의 영웅담을 역사적 환유(metonymy)로, 4.3의 역사화(歷史畵)로 등극한다. 제주 은갈치 같은 빛들이 그녀의 초상화를 뒤덮으며 반짝인다. 권력자들에 의해 제작된 역사화의 대척점에 선 민중의 역사화가 새롭게 창출되며 강렬한 빛을 선사한다.


“인물을 이렇게 다룬 것은 2019, 2020년도쯤이에요. 그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기록적인 그리고 그것을 그냥 사진이 아닌 물론 사진으로 이렇게 크게 뽑을 수는 있겠죠. 이렇게 그림을 크게 그려놓으면 그 메시지가 더 강력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관심을 끌 수 있고요, 밑에다가는 어떤 인물인지 적어놓았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대충은 알 수 있게요. 좀 더 깊게 얘기를 듣고 싶어 하시는 분한테는 설명을 해 주죠. 이분은 4.3의 희생자이고, 여성으로서 수형생활을 했고, 이처럼 어떤 배경을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더욱 감동을 받으시더라고요. 어떤 친구는 저 앞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그래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사실주의를 넘어서 역사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민중에게 진정한 회화를 제시하고 진실한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미술을 갱신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역사란 언제나 도덕관을 타락시키고 개인을 처참히 쓰러뜨리는 그런 초인간적인 차원의 개입이 배제된 역사를 말한다. 진정한 역사란 여러 가지 허구의 속박을 벗어난 역사다. 미술가는 진실을 그리기 위해 현재의 시간으로 열린 시선이 필요하다.”(이광래(2007), 「미술을 철학한다」, 미술문화사, p. 93.)


이명복의 역사화는 쿠르베가 말하는 진실한 역사를 재현해 낸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진실한 역사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민중의 시선에서 이해되는 작품을 생산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우선 이명복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70여 년의 세월을 뚫고 4.3의 진실을 밝히고 무죄선고를 받은 인물을 새로운 회화 작품으로 구현함으로써 사실주의를 넘어선 역사화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의 장면을 재구하는 그림이 아니지만 그 자체로 4.3의 역사를 서정적으로 그려내면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만들어내고, 그 배경을 알았을 때 느끼는 감동이 더욱 충만해지는 구조다.


한편 이명복 화가는 역사화의 또 다른 측면을 놀랍게 표현하였다. 억압받아온 민중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던 작풍과 달리 기괴미(奇怪美)를 통한 가해자들의 역사를 회화적으로 구현해 놓았다. 「뿌리」, 「광란의 기억4」, 「사라진 꿈」, 「수상한 오후」와 같은 작품들이 그런 특성을 잘 드러낸다.
 

「뿌리」(212×148cm, 한지에 아크릴, 2021.)

 

「광란의 기억4」(183×249cm, 장지에 아크릴, 2023.)
 

「사라진 꿈」(153×208cm, 장지에 아크릴, 2023.)



「뿌리」는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를 통해 착안한 작품이다. 김수영 선생 탄생 100주년 전에 맞춰 2021년에 현대사를 그려놓은 것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이라 했다. 시인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더러운 역사라도 시커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뿌리’에 비한다면 좋다고 말한다. 화가는 수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권력을 유지하려 한 독재자들의 역사가 어떻게 뻗어나갔는지를 하나의 화폭 속에 그려넣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여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뿌리로 표현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민중의 모습을 그려내고, 하단 중앙에 고뇌하는 김수영을 그려 넣었다. 김수영의 표현처럼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이처럼 현대사의 부정적 대상을 그릴 때면 기괴해진다. 야만성과 비합리성, 미성숙성 따위와 연결되는 기괴(奇怪)의 세계와 연결된다. 머리만 덩그러니 있고 그 목을 따라 수많은 뿌리가 뻗쳐나가는 기괴한 형상은 한국 현대사의 부정적 세력의 계보를 보여주면서, 쿠르베가 말하는 역사화의 지향점에 가 닿는다.


2023년에 창작된 「광란의 기억 4」는 제주 섬을 배경으로 제주 4.3의 가해자들을 한 화면에 담아낸 작품으로 역시 기괴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라산 꼭대기에 인상을 찌푸린 이승만의 머리만을 올려놓고, 하단에 미군정의 군인들, 조병옥을 비롯한 제주 민중 탄압에 앞장섰던 군경을 그렸다. 「사라진 꿈」은 철원평야를 배경으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등 얄타회담의 당사자들을 그리고 하단에는 6.25 전쟁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그려넣었다. 수많은 해골과 뼈다귀들이 둥둥 떠다니며 기괴한 형상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명복은 역사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기괴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역사의 장에서 악행을 저지른 인물들을 단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여순 사건을 다룬 「광란의 기억 3 – 여순」 역시 「뿌리」의 기본 구상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가해자들의 계보를 그려내고, 그 아래에서 고통받았던 여순 민중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광란의 기억 3 – 여순」 227×546cm, 장지에 아크릴, 2022.


작품 속 형상들은 사진을 이용한 것이다. 약간은 포토몽타주 형태를 띠고 있다. 남겨진 실제 사진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화폭 속에 담아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화가는 여순과 관련해서 90%의 사진 자료를 ‘칼 마이던스(Carl Mydans)’의 사진 작품에서 가져왔고, 몇 부분은 이경모(1926~2001) (“광양 출신 사진가 이경모는 호남 신문사(현 광주일보의 전신)의 사진부장으로 재직하며 각종 역사적인 사건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 격동기의 현장과 전국 각지의 풍경과 문화재, 그리고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는 사건과 풍경의 이면을 사진으로 섬세하게 담아내며, 단순히 역사적 자료로서의 기능을 뛰어넘어 예술적·미학적 측면에서의 고유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한국전쟁부터 여순사건까지 찰나에 담긴 역사적 순간」, 『남도일보』 2022. 9. 26.)) 선생이 찍은 사진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사진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가해자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 민중의 고통에 대한 사실적 장면 묘사 등으로 역사화를 구성한 것이다.(그 외에도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이재수와 그의 누이를 그린 「남매」나 동학혁명을 담은 「불길」 같은 작품도 역사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남겨진 사진과 최대한 근사치로 그려내려고 노력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건 기록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언제까지 이렇게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인물들이 제주도민을 어떻게 했다는 것에 대한 강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저기 지금 보면 그때 당시에 제주도의 연대장들 그다음에 이제 여기 지금 오른쪽 하단에는 저 사람 같은 경우는 한경직 목사예요. 한기총. 이제 사람들은 다 의문을 가지겠죠. 아니 한경직 목사가 왜 거기에 있나 얘기를 하는 거죠. 한라산 꼭대기에는 이승만을 그리고요.”

이명복 화가는 역사화에서 뒤틀린 근현대사를 진실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 의식 같은 것을 느낀다. 독재 정권하에서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제주 4.3의 피해자들을 전면에 등장시키고, 기괴한 형상들 속에 가해자들의 계보를 진실하게 알리려는 그의 노력은 놀라울 정도다. 언젠가는 그 진실이 대중에게 가 닿을 날이 올 것이다. 이명복 화가는 한국 근현대 역사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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