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찰은 차벽(車壁)을 허물고, 시위대는 폭력적 시위도구를 버리자
며칠 전 KBS에서 명견만리라는 프로그램에서 피터 언더우드의 강연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터 언더우드는 우리가 잘 아는 연세대학을 설립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후손인데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대한민국을 너무나 사랑한 외국인 분 중에 한 분이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피터 언더우드가 쓴 ‘퍼스트 무버’(황금사자, 2012.3.5)라는 책을 빌렸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라는 의미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의 반대말에 해당할 수 있다. 전자는 새로운 기술 등의 개척자의 의미라면 후자는 이를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의 강의 중에서 특히 대한민국의 ‘재벌’에 대한 개혁 없이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없다는 내용에서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정말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다. 재벌이라는 제도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에서도 생겼으나 이스라엘에서는 부(富)의 상속(相續)을 2단계, 즉 아들에게까지만 허용하고 다음단계 즉 3단계와 4단계의 자손에게는 허용되지 않게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고 들었다.
그나마 그들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떤가?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여하에 관계없이 수많은 부를 누리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끼리 부를 무한정 늘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재벌회사의 부(富)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이를 물려받기도 하고, 다른 회사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면서 절대 망하지 않는 회사를 유지하면서 부를 축척해간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재벌이 경영을 문어발식으로 하여 재벌을 제외한 다른 어떤 회사도 존재할 수 없는 경제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재벌이 자동차도 만들고, 택배회사도 만들고, 빵공장도 만들고, 두부 공장도 만들고........무한히 창출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중소기업이 설 수 있는 환경을 없애버림으로써 재벌을 제외하고는 먹고 살 수 있는 토양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이 고착화된다면 재벌에 묶여 국민 개개인의 삶과 창의적 발상에 의한 새로운 기업이 만들어지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언더우드씨는 이 점을 특히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동감하는 부분이다. 경제 주체 중에서 재벌만 존재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는 재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소위 재벌 몇 사람만을 위한 경제구조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사회 상황은 그럼 어떠한가?
귀족적 지위를 가진 권력자들의 소수에 의해 행해지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를 독재라고 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헌법에 의하면 자유민주국가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국민들에게 자유와 민주가 주어져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농후하다.
‘자유(自由)’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의미와 자신의 의지의 구속 없는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의 의미는 국가권력 등으로 부터의 자유를 후자의 의미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특정한 구속 없이 행하는 자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재벌’정도의 소수의 ‘권력자’를 제외하고는 자유가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럽다. 자유라는 것은 자신의 의사대로 행해진다고 본다면, 우리는 소수의 권력자를 제외하고는 자유를 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한마디로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역사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그 국정교과서는 복면이 씌워진 상태로 제작되어져 내년부터 교육을 받게 된다. 국정교과서는 다양성을 추구하며 다양한 가치관에 의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왜곡된 하나의 사고를 주입시킨다는 것은 자유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용인되기 어려우며, 독재적 국가에서나 용인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어제 대통령이 전 주말에 있었던 노동자들의 집회를 두고 복면, 폭력 등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대통령의 불통과 경찰의 폭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대통령의 태도는 대통령이나 경찰은 언제든지 자유로운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으나 반대로 노동자 등은 자유로운 의사는 언제나 무시된다는 것이다.
오늘 경찰청장은 국회 답변에서 12월5일 2차 노동자 집회를 불허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헌법에서 보장되고 있는 기본권 중에 기본권이다.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을 미리 법률로서 방법(方法)이 아닌 여부(與否)를 제한하는 것도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위반될 수 있다.
또한 경찰과 시위자들을 미리 차벽을 설치하여 가로막는 것 자체가 위헌적 요소가 있다. 만약 차벽(車壁)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그 결과는 아무도 단정(斷定)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차벽을 설치하여 시위대가 진행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위헌이라 할 수 있다.
집회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것도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주말에 광화문광장에서 시위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다. 경찰이 집회와 시위를 허가제로 운영하지 못하게 한 헌법조항에 비추어 본다면 신고를 거부하는 것 또한 위헌적 여지가 있다.
대통령은 복면에 벗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시위대는 경찰 차벽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시각이라 본다. 시위대는 복면을 벗고 밧줄이나 쇠로 만든 장구를 버리고, 경찰은 차벽이나 물대포를 없애는 것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First Mover)’와 같이 새로운 길을 창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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