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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우물 안 개구리_정승열 법무사(대전)

이선용 / 기사승인 : 2022-02-04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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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법무사.jpg


※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은 사대교린 정책으로 명에는 사대하고, 여진과 왜 등에는 교린정책을 폈다. 특히 왜는 세종 때 부산포, 내이포(乃伊浦: 진해)· 염포(鹽浦: 울산) 등 삼포를 개항하고, 거주 왜인을 60명으로 제한했지만,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나자 이들에게 귀환을 명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자 1510년(중종 5년) 왜인들이 삼포왜변을 일으켰다. 삼포왜변 이후에는 부산포만 열었지만, 1544년 왜선 20여 척이 사량진(蛇梁津: 통영)을 공격하는 사량진왜변 이후에는 왜인의 내왕마저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1547년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정미약조를 체결하면서 일본 국왕의 허가증을 가진 선박에 한하고, 세견선은 대선 9척, 중·소선 각 8척으로 제한했다. 1555년(명종 10년) 다시 을묘왜변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반발 기미가 있는 다이묘들의 관심을 대외로 돌리고, 중국의 풍부한 은(銀)을 독차지할 속셈으로 조선과 명 정벌을 꿈꿨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여 신무기로 무장하고, 천주교 사제들에게 대포와 선박을 지원해주면 조선과 명을 정복한 후 포교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587년 도요토미는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에게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征明假道)는 뜻을 조선에 전하도록 했다. 대마도주는 도요토미의 야욕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조선에 거짓으로 도요토미가 일본의 국왕이 되었으니 축하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에서는 처음에는 왜의 요구가 황당무계하다고 거절했지만, 결국 1590년 3월 서인 황윤길을 정사,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왜에 보내 사정을 정탐하도록 했다.

 

약 1년 만인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돌아온 황윤길은 도요토미가 병선과 군사를 늘리는 등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왜국은 조선을 넘보지 못할 상태라고 말했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하게 된 당파싸움의 결과는 1592년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 정유재란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세워졌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바쿠후가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가 세워졌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일체의 지원도 하지 않았음을 극구 변명하면서 국교회복을 요청하니, 조선은 일본과 강화와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와 유민 송환 등으로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惟政)을 회답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보냈다. 반면에 일본 사신의 한양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했다. 일본은 그렇게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를 보냈다.

 

임진왜란 이후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에도 막부는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또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통신사는 정삼품 당상관인 참의(參議)급에서 정사(正使) 아래 300~5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일행이었다. 지금은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대마도 히타카스 항까지 49.5km를 70분이면 도착하고, 후쿠오카나 나가사키까지도 180㎞를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당시는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 상륙했다가 다시 바닷길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상륙하여 육로로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왕복 4,000km 행차에 장장 6개월~ 1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사실 초기에는 통신사의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고, 또 화가들은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다. 한편, 일본으로부터는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美濃紙) 등이 전래되었다.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맞으면서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접대비로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했지만, 1811년부터 조선에 통신사 파견 중지를 요청했다. 우리는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었다고 자랑하지만, 왜 중단되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은 크게 다르다.

 

우선, 일본 사학계에서는 조선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을 조선에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조선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많다. 이것은 조선의 잘못된 외교정책이 가져온 실책이다. 둘째, 일본은 통신사를 초기에는 조선과 명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이용했지만, 에도 바쿠후는 1633년 네덜란드에 무역독점권을 주면서 난학(蘭學)으로 국제정세를 알게 되고, 매년 정기적으로 세계정세를 보고하도록 하면서 조선과의 교류를 불필요하게 여겼다. 네덜란드 상관장은 1633년부터 1850년까지 166차례나 에도의 도쿠가와에게 국제정세 보고서인 ‘풍설서(風說書)’를 전달했는데, 에도 막부는 공자·맹자(성리학)를 버리고, 석가모니(불교)도 탈피하여 신사(神社)를 창건하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세웠기 때문이다.

 

즉, 1711년 11월,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취임을 축하하는 여덟 번째 통신사 일행이 갔을 때, 일본 측 상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대서양과 구라파의 이탈리아, 네덜란드인들을 직접 보고, 지금은 공들과 마주 앉아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말했다. 부사 임수간이 “대서양은 서역의 ‘나라’ 이름이지만, 구라파와 이탈리아는 어느 곳에 있는가?”하고 되묻자, 하쿠세키는 “조선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하고 비웃었다. 8년 뒤인 1719년, 아홉 번째 통신사에게 쓰시마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제술관 신유한을 따로 불러 “우리는 일본이다. 왜적이니 오랑캐 추장이라 부르지 말라. 중국은 조선이 시종 군신의 예를 폐하지 않았던 까닭에 예의 바르다고 칭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1763년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통신사에게 다키 가쿠다이(瀧鶴臺)는 “나가사키에 들어오는 외국 선박이 120~130개국이나 되고, 지구본이나 곤여전도(坤與全圖), 명청회전(明淸會典), 일통지(一統志)에도 실려 있지 않은 나라도 많다. 그런데, 귀국은 중국만 귀하게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시하니, 천지의 광대함을 알지 못하는가(識見之陋 不知天地之大者)”하는 충고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을 깔본 일본은 1811년 이후에는 교류를 단절하고, 1887년 메이지 유신으로 개화하더니 또다시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으로 식민지를 삼았다. 세계 최빈국 북한에 동포애를 주장하며 무한 애정으로 지원해주고, 앞장서 대변인처럼 변호해주던 우리 정부는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개발하고, ICBM을 발사하면서 국제평화를 위협하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다. 세계를 보는 안목이 없는 것인지, 북한과 함께 ICBM과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을 자랑하던지 아니면 비난해야 마땅할 텐데도 유구무언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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