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애 가수처럼 삶을 즐기기로 약속한 경영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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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민호와 진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경영학과’. 민호가 내민 상담 신청서에는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 한 줄도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는 그보다 신청서를 작성할 때 손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상처들에 더 신경이 쓰였다.
“손에 상처가 많네”
“제가 치킨집에서 알바를 해요. 치킨을 튀기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요즘은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주방에서 일을 하는구나. 튀김 요리하다 보면 목에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어차피 가수 꿈은 포기했는데요. 뭐.”
“선생님은 민호 팬인데. 민호가 가수 되면 팬클럽에도 가입하려고 했는데….”
민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참 쓸쓸했다.
“선생님. 지금 제 내신이면 어느 대학 정도 갈 수 있어요?”
“이 점수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은 좀 어렵겠다. 지방에 있는 대학 경영학과는 가능하겠다. 어? 너 왜 웃니? 지방대 가는 게 좋으니?”
“예. 선생님 저는 지방대 가고 싶어요. 제가 태어난 섬 근처에 있는 대학으로 갈 수 있으면 더 좋겠어요.”
민호는 섬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민호 형은 어려서부터 음악 쪽에 천재적 소질을 보였다. 민호는 부모님께 늘 형 다음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늘 공부와 음악 때문에 시간이 없는 형에 반해 민호는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가끔 바다에서 혼자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재미있었다. 멸치잡이 배 세 척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정이 많은 분이셨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어머니도 따스한 분이셨다. 민호의 우상이었던 형은 늘 다정하게 민호를 대해주었다. 음악 공부를 위해 어머니와 형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민호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정리하고 민호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피아노 학원을 다시 시작하고 아버지는 학원 영업을 도와드리고 형의 운전기사 역할을 했다. 그때까지는 행복했다. 그런데 형이…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교통사고는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어요. 어머니는 음악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하시면서 피아노 학원을 접으셨어요. 아버지는 택배하시고 대리운전하시면서 생활비를 벌고 계세요. 아버지께 감사하고 죄송해요. 좋아하던 술도 딱 끊으시고 가족들을 위해 일하시는 걸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해요.”
“그렇구나. 민호가 왜 알바를 하는지, 왜 경영학과로 가려 하는지 잘 알겠다. 선생님에게 그런 깊은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왜 고향 근처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싶어 하니?”
“실은 지난 주말에 고향에 혼자 다녀왔어요. 추운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려고 했어요. 그런데요. 선생님. 노래가 안 나오더라고요. 배에서 목까지는 소리가 올라오는데 입에서 나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펑펑 울기만 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사실 부모님 몰래 오디션도 몇 번 봤어요. 제 실력만으론 직업 가수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컬코치님들이 그러셨어요.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생활비 정도는 버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연습하고 또 연습할 때 돈이 너무 많이 든대요. 그래서 저보고 다른 길로 가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랬구나. 선생님 생각보다 민호가 더 많이 힘들었구나. 민호야. 선생님의 민호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수 정미애 씨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
“어떤 말이요?”
“가수는 못되어도 노래는 계속 부르고 싶어요.”
정미애 씨는 트로트 가수다. 전국 노래자랑 연말 결선에서 수상을 하면서 가수가 되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대중가수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암에 걸려 가수의 생명인 혀를 절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후에 그녀가 신곡을 들고 다시 방송에 등장하던 날, 사회자가 어떻게 아픔을 극복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수줍게 말했다.
“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어서요. 제 노래를 들어주시는 분만 계신다면 어디에서든지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민호는 휴대폰으로 정미애 가수와 관련된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저는, 제가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이분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네요. 그런데요. 선생님. 제가 노래로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긴데요. 생활기록부에 적으려고 경영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어요.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경영학과 가려고 해요.”
“오해하고 있나 보다. 선생님은 경영학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노래를 포기하지 말라고 한 거야.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전자를 마음껏 사용하면서 경영학도의 길을 가고, 어머님께서 물려주신 음악 유전자를 잘 활용하면서 가수는 못되어도 노래는 부르며 살았으면 하는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해요?” “민호야. 네가 만날 스무 살 세상은 너에게 다른 기회를 선물할 거야. 서른에는 또 서른의 세상이 네 앞에 펼쳐질 것이고 말이야. 음악과 함께하는 스무 살, 서른 살 이후의 세상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말길 바란다. 이렇게 해보자. 선생님이 우리 학교 음악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이 잘 아는 실용음악 학원 원장님과 상담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줄게. 입시 상담이 아니고 일생을 음악과 함께 지낼 수있는 방법에 대해 그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렴.”
얼마 후 민호의 부모님을 만났다. 축제 때 민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드렸다. 어머님이 우셨다. 그 노래는 민호 형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민호에게 참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동안 아들을 둘이나 잃은 상태로 지낸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민호가 두 분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렸다. 그리고 진지하게 미래 민호의 팬클럽 회원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린다고 하였다. 대학은 경영학과로 보내시길 바라고, 나는 민호가 노래와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힘이 닿는 한 애프터 서비스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건 강당에서 불렀던 민호의 노래 덕분에 내 마음이 정화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민호가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으려면 부모님께서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셔야 한다고, 용기 잃지 마시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이 다녀가신 다음 날 민호를 불렀다. 음악 전문 서적을 다루는 독립 서점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말해 놓았으니 치킨가게를 그만 둘 수 있으면 그리로 옮기라고 했다. 민호는 감사하지만 옮기지 않겠다고 했다. 치킨 가게 사장님께 가게 운영에 대해 배우고 있다고 했다. 목이 상해도 계속하겠느냐는 말에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가수는 못되어도 노래는 계속 부르려고 해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
다음 날 다시 민호를 상담실로 불렀다. 그리고 텀블러를 선물했다.
“계속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니 선생님이 더 말하지 않겠다. 자주 물 마셔가면서 일해라. 나는 네 노래 계속 듣고 싶다.”
텀블러를 만지작거리면서 민호가 말했다.
“제 공연 때 선생님은 평생 무료로 입장시켜 드려야겠네요.”
민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 그 말은 민호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문경보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교육전공 졸업
서울시교육청학부모지원센터 학부모교육 강사
자기주도학습 코칭전문가
문청소년진로연구소 소장
한국독서치료연구소 부소장
대광고등학교 진로진학 컨설턴트
서울 YWCA 청소년부 자문위원
한국 인성 교육협회 위촉교수
前 중동 중학교, 대광 중고등학교 국어교사
대광 고등학교 진로 교사, 상담실장, 생활관장
영락 고등학교 심리학 강사, EBS 출연교사
저서 「외로워서 그랬어요」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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