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및 언론에 관한 교과서들에 의하면 신문·TV·라디오 등 언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매체는 “사회의 목탁, 사회의 소금”이라고 한다. 국가·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진실”을 보도하고, 잘못된 점들을 바로 잡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그 생명이라는 것이다.
내가 50년대에서부터 우리 신문들이 혼탁한 정치를 정서(整序*)하고, 각종 부정을 파헤치고, 또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긍휼(矜恤)이 여기는 보도를 해온 점을 인정한다. 50년대에 나를 가르쳤던 국어 선생님은 토요일에는 아예 교과서는 제쳐두고, 몇 개의 신문의 사설을 읽고 소화하여 논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의 신문들은 온통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각 신문의 사설은 “논리·내용 면에서 수준이 높은 논평”이라, 우리의 국어 공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정치·경제·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한 폐단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고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었다. 지금 내가 각 신문과 잡지에 논평적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논리력”은 그때부터 길러온 실력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10개의 신문의 사설과 각 문학잡지에 게재되어 있는 논평의 글을 유심히 읽는다. 그러면서 신문들은 “무엇으로 유지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특히 그들이 다루고 있는 기사의 내용과 “오피니언”이라는 이들을 빌려 보도하는 글과 논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정치인의 언동이나,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한 비판 중에는 긍정되는 면도 있으나, 상당수 기사보도 태도나 논평은 정치나 경제활동에 대하여 마냥 허물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독일의 포르슈토프(E.Forsthoff) 교수는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비판은 잘못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된다.”고 한바, 신문 등 언론지의 논평은 그와 같은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무책임한 비판”으로 보일 때가 많다. 오늘날 신문도 기업의 일종이다.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일정 수입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고, 그 수입은 주로 “광고 수입”이다. 그리고 그 광고 수입은 대부분 그 신문의 독자 수에 의존된다. 신문들이 독자를 확보하고, TV가 시청률을 높이려고 여러 가지 애를 쓰고 있는 신실을 잘 안다. 내가 잘못 분석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상당수 불만 속에서 산다. 고로 신문들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게재하는 것 외에 보다 많은 비판적 기라를 싣는다.
특히 광고 수입은 기업들로부터 들어온다. 그리하여 기업들에게 비위 맞추는 기사를 더 많이 게재한다. 그것은 “가치판단” 문제와는 상관없고, 때로는 기업의 병폐를 덮으려 하기도 한다. 이런 신문의 논조·태도는 70여 년간 계속 되어온 악습적 관행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에게 “신문을 보지 말라”고 한 말은 신문의 널뛰는 비판에 좌우되면 장래를 내다보는 소신 있는 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일부 정책에 시행착오가 있어 이해 관계자들로부터 비판 받는 면이 있으면 국민 여론에 의한 정권지지도가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책임이 없는 자는 무제한 비판의 자유”를 누린다. 신문 등 언론 기관이 그렇다. 심하게 말하면 “신문은 가치 없는 여론”에 묻혀 산다고 볼 수 있다. 신문들은 “어른스러운 형평 있고, 사려 깊은 보도”를 생명으로 하여야 한다. “가치관이 바른 정부”야 말로 국민이 원하는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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