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길을 따라 함께 가는 민물장어들”
문경보
![]() |
그해 나는 젊었다. 문제투성이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모인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들의 담임. 겉에 드러난 행동보다 그 아이들의 마음과 둘러싼 배경까지 바라보기에는 나는 아직 젊었다. 아니 어렸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50명 전원이 학교에 출석한 날은 거의 없었다. 결석, 지각, 조퇴로 출석부는 엉망이었다. 학교에서 눈에 안 보이는 아이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등교한 아이들은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동시다발로 저질러댔다. 교내 사고를 정리하고 한숨 돌리려고 하면 어김없이 학교 밖에서 대형 사고를 쳤다는 전화가 왔다. 한밤중에 경찰서로 뛰어가는 일은 월중 행사였다. 스물두 번 담임을 맡았던 중에 가장 힘들었던 해였다. 그해, 우리 반 급훈은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에서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3학년으로 올라가자’로 바뀌었다. 그때 아이들이, 어느덧 30대 중반, 그러니까 담임을 맡았을 때 내 나이가 되었다. 그 친구들이 반창회를 하는데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반창회 장소로 가는 내내 중간에 돌아가고 싶었다. 늦은 저녁에 시작하는 그 자리에서 술에 취한 제자에게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퍼부었던 욕설, 기합, 체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반창회 장소로 들어갔다. 이미 반창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학생 때 담배를 하도 피워대서 ‘골초 3인방’이라 불리던 제자들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막 시작한 모범생 친구 두 명에게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하다가 나를 보고 소리 지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신들은 담배를 끊었는데 학교 다닐 때 범생이었던 교수님들이 담배를 엄청나게 피우는 것을 보고, 확실하게 금연 교육을 하는 중이라고 골초 3인방 중 한 명, ‘속사포 구라’가 이야기했다. 나는 점잖게 무게를 잡고 웃으며 제자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불러줘서 반갑다. 내가 먼저 이야기 좀 하겠다. 다 기억하겠지만 너희들 고2 때 내가 심하게 했다. 그래서 사실 여기 오기도 불편했다. 그렇지만 너희들 보고 싶어 왔다. 알고 있겠지만 난 불편한 것은 잘 못 참는다.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으면 욕이라도 괜찮으니 지금 실컷 해라. 뭐 욕으로 안 풀리면 나 한 대 쳐라. 그래야 내가 편안할 것 같다.”
제자들은 웃기도 하고, 어색한 표정도 짓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장난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저래서 꼰대들은 안된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저 양반은 그저 지가 착한 사람이어야 되는 줄 아는 사람이라니까.”
영등포에서 쌀집을 하는 성호였다. 우리 반에서 최고의 악동이었다. 결국 고3 1학기를 못 마치고 학교를 떠나버린 아이였다.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말려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영원한 담탱이 문경보 선생님. 그때처럼 운동장 오리걸음으로 같이 열 바퀴 돌고 싶고, 욕도 왕창 먹고 싶어서 오늘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처럼 그 저질스럽고 상스러운 욕 바가지로 퍼부어주세요. 그 욕이 그리워서 왔다 이 말입니다.”
나는 당황했고, 제자들은 심각했다. 식당 안에 찬 기운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할렐루야! 선생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무엘이었다. 워낙에 잘난 척하는 것을 좋아해서 ‘나잘난’이란 별명을 가졌던 친구였다. 남에게 충고하는 것을 좋아하고 본인이 원해서 학급 종교 부장을 했고, 작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친구였다.
“그러니까 아마 10월이었을 것입니다. 10월 어느 좋은 날에 우연히 우리 반 친구들 전원이 모두 등교했습니다. 그날은 아무도 지각, 조퇴, 결석을 하지 않아서 저희는 물론 교과 담당 선생님께서도 신기해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종례 시간에 들어오셔서 화를 쏟아 내셨습니다. ‘왜 오늘은 모두 다 왔어? 단체로 저녁에 무슨 일 저지르려고 그런 거 아냐? 얼마든지 해봐. 내가 너희들을 포기하나. 난 너희들 모두 3학년으로 반드시 진급시킬 것이다.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그렇게 못하나.’ 선생님께서 나가신 뒤 우리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씀, 저희에게는 참 낯선 말, 하지만 듣고 싶었던 말을 그날 해 주셨습니다.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봄, 덕수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장례식장에 친구들 몇몇이 모였을 때 성호가 선생님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서른을 넘겨도 세상은 너무나 어렵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점점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고등학교 때, 거기 있지 말라고,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학교로 돌아오라고, 욕하고 기합 주던 선생님이 그리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사무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제자들을 향해 큰절을 했다. 제자들도 엉겁결에 맞절했다. 한참 후에 일어나서 너희들에게 늘 미안했고, 언제나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살짝 욕설을 섞어서 했다. 제자들이 웃음꽃을 피웠고, 성호가 ‘그렇지! 이 맛이지!’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는 내 말에 제자들이 순서대로 일어나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완수.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대학생 때도 이 사회의 차별에 관한 분노가 깊었던 친구. 대학교 4학년 때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여자 친구를 만났는데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 정확히 말하면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면 허락하겠다는 여자 친구의 아버지 말씀을 듣고 자신을 키워 준 부모님을 배신할 수 없어서 헤어지기로 결심한 친구.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차별 없는 세상은 만들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라도 되고 싶어서 신문 기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벽과 늪으로 가득 차 있다며 화를 내는 친구.
진영. 수학만 잘했던 아이. 중학교 때 수학 천재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친구.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수학 이외의 과목 성적은 점점 수직 낙하를 해서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된 친구. 학교를 자퇴한 뒤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산 교재를 자랑하러 왔던 친구. 다른 과목 교재는 없고, 수학 교재는 일곱 권, 심지어 두 권은 같은 교재를 산 것을 보고 자기도 놀라 한참을 울던 친구. 이듬해 복학해서 다시 우리 반이 된 친구. 또래보다 한 살이 많은 상태로 졸업하고 지금은 경기도 변두리에서 작은 수학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 수학 덕분에 먹고 살만은 하지만 수학은 싫다는 친구.
종민.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할 것이라고 늘 외치던 친구. 아버지와 어머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던 친구. 경비회사에 취직하여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가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 친구. 의미 있고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폼 잡으며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친구.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시고, 어머니는 미장원을 하시는데, 그 직업 가진 것은 다 부모님 덕분이라는 친구들 말을 듣고 ‘그러네. 아! 그러네’하고 주저앉은 친구.
성원. ‘가치관 경매’ 프로그램을 하던 수업 시간에 ‘행복한 가족’에 자신이 가진 모든 가상화폐를 다 걸고, ‘이 가치관은 제가 반드시 사야 합니다. 이유는, 이유는, 여기서 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던 친구. ‘행복한 가족에 돈을 다 쓴 친구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첫 번째는 현재 가족끼리 잘 지내고 있어서 계속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하는 경우다. 이런 친구들을 우리는 ‘행복한 친구’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현재 가족끼리 그리 잘 지내지 못하는, 차마 남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힘겨운 경우다. 이런 친구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위대한 친구’라고 말한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누리고 싶은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고, 다른 이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내 말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가는, 지금은 노인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사회복지사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 그렇지만 허리 디스크가 생겨서 직업을 바꿀 생각도 있다는 친구.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갔다. 나름대로 자기 몫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으나 삶을 버거워하고 답답해하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벽 앞에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30대 중반 남자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였다. 거의 반창회가 끝날 무렵, 고등학교 때 합창반 솔로로 유명했던 가수 민솔이가 들어섰다. 요즘은 야간 업소에서 공연을 하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도 ‘7080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노래해! 노래해!’ 외치는 친구들에게 알았다고 손을 흔들면서 민솔이는 기타를 조율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노래 중 가장 행복한 노래 한 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마왕 신해철의 ‘민물 장어의 꿈’이었다. 친구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 거의 남은 게 없는데 /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 쉬지 말고 가라 하는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 또 다른 안식을 빚어 / 그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른 자잘한 욕심들아. / 얼마나 나일 먹어야 /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 고독의 무게를 찾는 것은 /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 흐느껴 울고 웃으며 /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자. 자. 이 처량한 노래가 왜 행복하냐고 묻고 싶죠? 너네들 앞에서 부를 수 있고, 너네들이랑 함께할 수 있고, 또 여기 문경보 선생님. 고등학교 때 선생님 아니었으면 담배를 끊을 수 없었는데, 담배를 안 끊었으면 좋은 노래를 부르지도, 어쩌면 먹고살 길도 막막했을 텐데… 그런 선생님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어서 이 노래가 행복한 노래라고 생각해. 너네도 보고, 선생님도 뵙고 하니까 참 좋다.”
우리는 크게 웃으며 민솔이에게 박수를 보냈다. 제자들 눈가가 촉촉해 있었다. 나도 그랬다. 민솔이의 고백은 우리들 모두의 고백이기도 했다.
그날 헤어지고 난 후 제자들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2학년 6반 친구들. 인생은 참 남루하고 부질없는 거다. 그래서 가끔은 멋진 옷도 사 입고, 비싼 음식도 먹고, 값나가는 공연도 봐주고, 호화로운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렇게 살길 바란다. 너희들은 자신에게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는 친구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인생을 즐기길 바란다.
고백하자면, 나는 너희들 나이 때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배우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쌓여가면서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무명 배우가 아닌 단역배우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중은 작지만, 자신의 역할이 있고, 설 수 있는 무대가 있고, 봐주는 관객들이 있으면 우리는 단역배우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그날 너희들 모임에서도 확인하였다.
친구들하고 오래오래 잘 지내라. 인생은 늘 너희들을 힘겹게 할 것이지만 그때마다 너희들 옆에 있는 친구들, 그 슈퍼맨들이 너희들을 구해줄 것이다. 그날, 나도 그런 친구 중 한 명이 된 것 같아 참 기뻤다. 우리 건강하자!”
[저작권자ⓒ 피앤피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